엘리자베트 폰 헤센다름슈타트 대공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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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 대공녀 엘리자베트''' ({{llang|de|Prinzessin Elisabeth von Hessen-Darmstadt und bei Rhein}}, [[1864년]] [[11월 1일]] ~ [[1918년]] [[7월 18일]]) 또는 '''엘리자베타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lang|ru|Елизавета Фёдоровна}}; Elizaveta Fëdorovna)는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아내로, 시아버지는 [[러시아의 군주|러시아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이다.
 
== 생애 ==
=== 유년기 ===
헤센 대공 [[헤센의 루트비히 4세|루트비히 4세]]와 대공비 [[영국의 앨리스]] 사이에서 차녀로 태어났다. 언니 [[헤센 대공녀 빅토리아|빅토리아]]는 [[에딘버러 공 필립]]의 외할머니이며, 여동생 [[헤센의 알릭스]]는 [[니콜라이 2세]]의 아내로, 러시아의 황후였다.
[[1878년]] 어머니와 여동생을 [[디프테리아]]로 잃고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곁에서 자랐다. 아버지 루트비히가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인 [[러시아 황후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의 조카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러시아의 황족들과 가까이 지냈다. 빼어난 미모와 사람의 시선을 끄는 매력을 지닌 엘리자베트에게는 많은 숭배자들이 있었는데 맨체스터 백작 찰스 몬태규나 [[헨리 윌슨]]도 그들 중 하나였다. 또한 사촌 오빠 [[빌헬름 2세]] 나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 2세 (바덴)|프리드리히 2세]]의 청혼을 받기도 했지만 이를 모두 거절하였다(프리드리히 2세의 구혼을 거절한 것을 빅토리아 여왕은 아쉽게 여겼으며, 프리드리히 2세의 외할머니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아우구스타 황후]]는 노엽게 생각했다). 결국 엘리자베트는 [[1884년]] 어릴 적부터 자주 보고 자란 마리아 황후의 아들 세르게이 대공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예배당에서부속 성당에서 결혼했다.
 
=== 러시아 대공비 ===
러시아 황실을 비롯해, 국민들은 아름답고 매력적인 새 대공비 엘리자베타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에게 호감을 가졌다. [[1891년]] 엘리자베타는옐리자베타는 [[모스크바]] 총독이 된 세르게이를 따라 [[크렘린 궁전]]으로 이주했다. 부부에게는 평생 아이가 없었는데 엘리자베타는옐리자베타는 자주 아이들을 위한 파티를 열었다. [[1901년]]에는 시동생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마리아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드미트리 파울로비치파블로비치 대공]]을 대신 돌봐주었다. [[1905년]] 세르게이는 혁명가 청년에게 암살되었고, 엘리자베타는옐리자베타는 직접 감옥으로 찾아가 암살범의 구명을 청원했으나 상대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남편 사후, 아이들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된후 집을 수녀원으로 바꾸고 수녀로 살아간다. [[1905년]]부터 러시아 황실에는 황태자의 혈우병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라스푸틴]]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엘리자베타는옐리자베타는 이를 염려해 황제 부처에게 편지를 쓰는 등 노력을 했으나 허사로 끝났다. 이후 라스푸틴은 [[펠릭스 유스포프]]에게 암살되었고, 황후는 언니 엘리자베타가옐리자베타가 암살에 가담했다고 믿어 자매의 사이는 틀어지게 되었다. [[1909년]]에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수도원을 설립하여 원장으로 취임했고, 모스크바의 병자와 고아들을 돌보았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나서도 망명하지 않은 채 러시아에 남았다. 그녀는 결국 [[1918년]] [[7월 18일]] 살해되었으며 죽는 순간까지 다른 황족들을 보살폈다고 한다.
 
{{헤센 대공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