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친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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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친왕완왕'''(完親王, [[1868년]] ~ [[1880년]]) 또는 '''완친왕''', '''와화군'''은 [[조선]]의 왕족이자마지막 대한제국의[[임금]]이자, 황자이며[[대한제국]]의 추존초대 친왕이다.[[황제]]인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서장자로,[[서장자]]이다. [[귀인 이씨 (영보당)|영보당 귀인 이씨]] 소생이다. 완화군(完和君)에 봉해졌다. 한때소생이며, [[흥선대원군1876년]] 그를[[4월 총애하였으나10일]] 일찍완화군에 요절하였다봉해졌다.{{웹 인용
| url =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za_11304010_001&tabid=k
| 제목 = 왕자 이선을 완화군으로 봉하다
| 저자 =
| 날짜 =
| 확인날짜 = 2012-07-21
}} 한때 [[흥선대원군]]은 그를 총애하였으나 일찍 요절하였다.
 
[[영종정경]]부사에 임명됐고, 본명은 이선(李墡)<ref name=dd>[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read.php?pid=18&id=273 고종은 왕도수업을 어떻게 받았나? - 한국역사연구회]</ref>이다. 시호는 효헌(孝憲). 따라서 완효헌왕(完孝憲王)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통상 '완화군'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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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고종]]은 [[명성황후]]와 혼인하기 이전에 궁녀출신이었던 이씨를 총애하고 [[1868년]]에는 영보당 이씨에게서 아들이 태어나자 이를 사이에 두고 두 여인 간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다툼이 전개되었다고 한다.<ref name=dd /> [[흥선대원군]]은 첫 손자인 완화군을 총애하였다. 또한 명성황후가 낳은 아들 둘이 연이어 요절한데다, 두 번째 아기는 항문이 없는 기형아로 [[흥선대원군]]이 준 인삼을 달여 먹였다가 아이가 신열을 일으키다 갑자기 사망하면서, 둘의 관계는 묘하게 흐르게 된다.
 
[[영종정경]]부사에 임명되고, 조부 [[흥선대원군]]이 완화군을 매우 총애하여 세자의 자리에 염두에 두고 봉하려 했으나, [[명성황후]] 때문에 실패하였다<ref name=dd />. [[1880년]]에 병을 얻어 사망했는데, 이때 완친왕을완왕을 낳은 귀인 이씨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실어증이 걸려 병을 앓기 시작했다. 완친왕의완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명성황후의 모략이 개입되어있다는 설이 있다.{{출처}}
 
== 사후 ==
사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안장되었다가, [[1945년]] 광복 이후 도시계획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 산(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근처에 이장되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완친왕으로완왕으로 추존되었고, 효헌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일찍 죽자 대원군은 그의 장남 [[흥친왕]]의 장남 [[이준용]]에게 기대를 걸게 되었다.
 
== 관련 항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