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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년, 손책이 [[유요 (후한)|유요]](劉繇)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유요가 예장으로 밀려나자 유반은 황실의 종친끼리의 다툼은 옳지 못하므로, 유표가 예장 태수로 임명한 제갈현이 유요를 지원하는 주호와의 대립을 멈추고 귀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무시당했다. 제갈현은 유요와 협력한 주호에게 격파당해 돌아왔다.<ref>오서 4절 유요태사자사섭전</ref><ref>후한서 허소전</ref> 후에 유반은 남군을 비롯한 형남 4군을 유표의 세력에 넣는데 [[채모]](蔡瑁)와 함께 지대한 공을 세워 관직이 군사장군에 이르렀다.<ref>199년에 이르러서야 장사로 침탈해온 동습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유표가 형남 4군을 온전히 손에 넣은 것은 197년 ~ 199년 사이로 추측된다.</ref>
200년, 손책이 죽고 손가의 세력이 불안정해지자 유표의 지시에 따라 [[문빙]](文聘)과 [[황충]](黃忠)을 부장으로 시상과 예장, 단양을 공격했다. 예장에서 [[오경]]을 격파하고 단양에서 [[능조]]를 격파했으나 시상은 수개월간 제압하지 못했다. 결국 이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태사자]]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귀환했다.<ref>http://www42.tok2.com/home/sonpoko/taisigi.html</ref> 201년, 유비가 조조에게 패해 유표를 의탁해오자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유표를 설득했으며, 유비에게 나후(羅侯)의 구씨(寇氏)의 아들 [[유봉]](劉封)을 양자로 권했다. 203년, 다시 황조와 연합하여 시상을 공격하여
== 생의 후반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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