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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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오전 전남도청과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21일 오전 시민 대표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확성기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ref name='충정작전1'/>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 광주 폭도의시민의 저항항쟁 ====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법집행을폭력으로부터 무시하고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화순, 나주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했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시아자동차으로 몰려가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계엄군은 무장폭도들도 국민인지라 일단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21일 저녁 시민군은 계엄군이 물러난 후에도 정부기관인 전라남도 도청을 무장점령했다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이 발표했다. 이희성은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 광주외곽봉쇄작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