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훈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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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조정에서는 우리를 [[능지처참]]하고 일족들을 모두 주살하려고 한다. 어차피 죽는다면 (관군과) 싸워서 죽는 것이 낫다. 한번 더 부귀영화를 얻어서 옛날처럼 마음 편한 생활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로서이로써 서주의 교병들은 마침내 반역을 개시하게 되었다.
 
== 정부군과의 전투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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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훈에게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은, 최언증과 그 부하들이 백성으로부터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여 지극히 평판이 나빴던 것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과 호족들이 방훈의 군세에 가담하면서 민란의 성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868년]] [[음력 9월|9월]](《[[신당서]]》에서는 [[음력 10월|10월]])에는 서주의 본거지인 [[팽성]]이 함락되었고, 최언증은 사로잡히고 그의 부하들은 장이 도려내지는 극형을 당하였으며 그들의 일족들은 몰살되었다. (단, 최언증은 방훈군이 서주를 점거한 이후에 이를 토벌하러 나온 정부군이 서주성 앞에 이르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방훈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서이로써 서주는 교병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서 방훈군은 [[화이허|회수]] 어귀를 점거하여 [[장안]]의 당나라 황실을 위협하였다. [[장강]]과 회수 일대는 대혼란에 빠졌고, 이후 그 일대의 많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방훈군의 진격에 호응하면서 방훈군은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 과정에서 참가한 인원도 이 무렵에는 총병력 20만 대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실적을 거둔 방훈은 조정을 위협하여 스스로 무녕군 절도사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다. 그런데, 조정의 방침은 어디까지나 토벌이었다.
 
=== 정부군과 맞서다 ===
조정은 우선 방훈군 측에 사자를 파견하여 시간을 버는 한편, 명장 [[강승훈]]을 방훈 토벌군의 총대장으로 삼고 왕안권(王晏權)과 대가사(戴可師)를 서주남면행영초토사(徐州南面行營招討使)로 임명하여, 남북 양쪽에서 세 방향으로 일제히 진격하여 방훈군을 서주성 아래에서 섬멸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또한, 이와 동시에 각지의 군대에도 동원령이 하령되면서 총병력 20만 대군의 정부군이 서주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강승훈은 내지에 있던 이민족인 [[사타|사타족]] 기마군단을 토벌전에 참가시켜 줄 것을 요청하여 이를 허락받았다. 이로서이로써 교병과 정부군의 사이에서 서주와 사주 일대를 둘러싼 격렬한 공방전이 개시되었다. [[869년]]의 일이었다.
 
방훈 토벌군의 대장 중 한 사람인 대가사는 3만 명의 우림군(羽林軍)을 이끌고 용맹만 믿고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회하를 건너 사주 동남쪽에 있던 도량성(都梁城, 현 [[장쑤 성]] [[우치 현]] 동남쪽)을 점령하였다. 이때 방훈군은 야음을 틈타 은밀히 철수하여 성을 탈출하였다. 대가사의 군세를 빈 성으로 유인하여 정부군의 실력을 피해 가면서 그 허점을 노려 이를 급습할 작정이었다. 과연 대가사가 도량성에 들어서자, 다만 성이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대가사는 승리했다고 여기고 아무런 방비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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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방훈군 내부에서도 점차 분열이 시작하였다. 실제로, 방훈군의 장수 중 한 사람인 맹경문(孟敬文)은 방훈을 배반하고 정부군 측에 투항하려다가 서주에서 방훈에 의해 살해되기까지 하였다. 강승훈도 투항을 받아들이는 작전을 채용하면서 방훈군은 싸워 보지도 않고 소멸해 가고 있었다. 사면초가인 상황에서는 아무런 조치조차 취할 수도 없었고, 단지 승려에게 시주를 하거나 소원을 비는 것 정도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방훈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방훈이 파견한 숙주(宿州, 현 [[안후이 성]] [[쑤저우 시 (안후이 성)|쑤저우 시]])의 수장(守將) 장현임(張玄稔) 등이 방훈을 배신하고 정부군 측에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처럼 정부군에 투항하는 배신자들의 속출로, 방훈군은 숙주와 서주에서 정부군에게 잇달아 패배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방훈군의 본거지인 서주 팽성이 정부군에게 함락되어 방훈군의 핵심 장병(즉, 계주에서 국경 경비를 서고 있다가 반란을 일으킨 서주의 교병들)들의 친족들과 관련자 수천 명이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서이로써 정세는 마침내 승패가 결정되고 말았다.
 
[[869년]] [[음력 9월|9월]], 방훈은 서주에서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석산(石山)으로부터 서쪽으로 철수하였으나 강승훈이 이끄는 보기(步騎, 보병과 기병) 8만 명의 정부군에 쫓기게 되었고, 정부군은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방훈의 주력부대는 송주 남성(南城)을 습격하여 일단 그곳을 점령하였으나, 거기서도 쫓기다가 변수를 건너 남쪽의 박주(亳州, 현 [[안후이 성]] [[보저우 시]])에 이르러서 정부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사타족의 추장 [[이국창|주야적심]]이 수천 명의 기마군단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방훈을 박주에서 추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