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키아 공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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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안티오키아 공국은 외부적으로는 십자군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는 공국의 지배권을 놓고 내분에 휩싸였다. [[1187년]] [[살라흐 앗 딘]]의 [[예루살렘]] 공격 당시 안티오키아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연합함대의 도움으로 무사했지만 이어 벌어진 [[제3차 십자군]] 전쟁 때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레몽과 콩스탕스의 아들인 [[보에몽 3세]]가 공국을 지배했고 그의 아들 [[보에몽 4세]]는 [[하틴 전투]] 이후 [[트리폴리 백국]]의 섭정이 되었다. [[1201년]] 보에몽 3세가 죽자 보에몽 4세와 형제 레몽 뤼펭은 공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그사이 [[보에몽 5세]]와 [[보에몽 6세]]를 거치는 동안 [[제5차 십자군]],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의 [[제6차 십자군]],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제7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지만 안티오키아 공국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1254년]] 오랜 내분을 끝내고 보에몽 6세가 정권을 잡았지만 [[맘루크 왕조]]의 이슬람과 [[몽골]]의 전쟁으로 안티오키아는 위협받았다. 맘루크의 [[술탄]] [[바이바르스]]는 몽골을 격파하고 몽골의 영향에 있던 안티오키아를 [[1268년]]에 점령하였다. 이로서이로써 안티오키아 공국은 멸망하였다.
 
== 안티오키아 공작 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