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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서울특별시|경성부]]에서 당시 유명한 [[서화가]]였던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사군자]]·[[묵화]] 등을 교습하였다. 이듬해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묵죽 墨竹〉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그 후 [[가와바타 미술학교|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1935년]] [[일본]]으로 가서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에게 사사했으며, 서양화 기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1945년]]까지 선전과 일본화원전에서 입선과 특선 또는 무감사로 계속 출품했다. [[1946년]] 배렴·장우성·김영기·조중현 등과 함께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했으며, [[1948년]] [[홍익대학교]] 주임교수로 있었다. 그 후 [[1962년]] [[파리 (프랑스)|파리]] 파케티 화랑에서 콜라주전을 열었으며,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주목받았다. [[1967년]]에는 [[한국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 주선으로 석방,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일로 인해 국내화단과 단절되었으나 스위스와 프랑스에 이어 일본·미국·벨기에를 중심으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전개했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 문헌화랑에서 신작 〈무화 舞畵〉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해 백건우·윤정희 부부납치음모라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와는 완전 단절되었다. 그 후 [[1983년]]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이후 [[1985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1989년]]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하였다.
 
네이트 백과사전 <ref>[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63317&v=43]</ref>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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