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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 [[조선 중종|중종]] 조 기록에는 봉성군의 집을 짓는 일로 인해 대간들이 상소를 올려 그 공사가 중지된 내용과<ref>《조선왕조실록》중종 91권, 34년(1539 기해 / 명 가정(嘉靖) 18년) 6월 22일(무오) 2번째기사</ref>, 봉성군이 부리던 종 효림(孝林)이 다른 집의 종과 싸운 일 등만 기록되어 있고 봉성군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ref>《조선왕조실록》중종 94권, 35년(1540 경자 / 명 가정(嘉靖) 19년) 10월 24일(임오) 2번째기사</ref>. 한편 봉성군은 정랑(正郞)을 지낸 [[정유인]](鄭惟仁)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그 혼인 시기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으나 적어도 [[1545년]](인종 원년)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ref>《조선왕조실록》인종 1권, 1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1월 24일(무오) 3번째기사</ref>.
 
[[1545년]](인종 원년, 명종 즉위년) [[조선 인종|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요절하고 [[조선 명종|명종]]이 즉위하였다. 이 해 [[음력 9월 1일]] 당시 [[경기도]] [[관찰사]]로 있던 [[김명윤 (조선)|김명윤]](金明胤)이 역모를 고변하였는데, 그 내용은 [[조선 인종|인종]]의 외숙이 되는 [[윤임]](尹任)이 경원대군([[조선 명종|명종]]) 대신 [[계림군]](桂林君)<ref>[[조선 성종|성종]]의 서자 [[계성군]]의 양자로, [[조선 중종|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여필]]의 외손자이다. 따라서 [[윤임]]은 계림군의 외숙이 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805&mobile&categoryId=200001080 두산백과 〈계림군〉] 참고</ref>이나 나이가 어린 봉성군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 명종|명종]]은 계림군에 대해서는 잡아들일 것을 지시했으나, 봉성군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특별히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여 우선 신문하지 말라고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1일(신유) 3번째기사</ref>. 당시 이 역모를 고변한 김명윤은 봉성군의 이모부였는데, 권력을 잡은 [[윤원형]](尹元衡)과 [[이기 (1476년)|이기]](李芑)에게 아부하기 위해 이같은 일을 꾸민 것이다<ref name="isshi"></ref>.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시작이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805&mobile&categoryId=200001080 두산백과 〈계림군〉]</ref>.
 
그러나 고변 5일 후인 [[음력 9월 6일]]부터 시작된 관련자들에 대한 공초에서 지속적으로 봉성군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 인종|인종]]의 외숙부인 [[윤임]]이 [[조선 인종|인종]]이 죽으면 질병이 있는 경원대군([[조선 명종|명종]]) 대신 [[계림군]] 혹은 봉성군을 왕위에 세우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면 그 외숙 [[윤원로]](尹元老) 등이 득세하여 반드시 자신의 집안은 멸문을 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며, 계림군 혹은 봉성군을 세우면 명종을 축출할 수 있다는 말도 나왔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6일(병인) 3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6일(병인) 9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6일(병인) 13번째기사</ref>. 결국 이러한 이유로 인해 봉성군은 수 차례에 걸쳐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명종은 계속해서 봉성군에 대해 나이가 어려 보호해주고자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11일(신미) 6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18일(무인) 1번째기사</ref>. 한편 봉성군의 생모 [[희빈 홍씨]]는 일련의 일들이 벌어지면서 마음이 불편해져 결국 대궐에서 나와 사가로 돌아가기도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21일(신사) 5번째기사</ref>. 그러나 이후에도 대간들의 봉성군 탄핵은 계속되었고<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10월 9일(무술) 2번째기사</ref>, 결국 봉성군은 이듬해인 [[1546년]](명종 원년) [[음력 9월 12일]] [[강원도]] 울진(蔚珍)으로 귀양을 갔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4권, 1년(1546 병오 / 명 가정(嘉靖) 25년) 9월 12일(병인) 3번째기사</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