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성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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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변 5일 후인 [[음력 9월 6일]]부터 시작된 관련자들에 대한 공초에서 지속적으로 봉성군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 인종|인종]]의 외숙부인 [[윤임]]이 [[조선 인종|인종]]이 죽으면 질병이 있는 경원대군([[조선 명종|명종]]) 대신 [[계림군]] 혹은 봉성군을 왕위에 세우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면 그 외숙 [[윤원로]](尹元老) 등이 득세하여 반드시 자신의 집안은 멸문을 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며, 계림군 혹은 봉성군을 세우면 명종을 축출할 수 있다는 말도 나왔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6일(병인) 3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6일(병인) 9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6일(병인) 13번째기사</ref>. 결국 이러한 이유로 인해 봉성군은 수 차례에 걸쳐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명종은 계속해서 봉성군에 대해 나이가 어려 보호해주고자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11일(신미) 6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18일(무인) 1번째기사</ref>. 한편 봉성군의 생모 [[희빈 홍씨]]는 일련의 일들이 벌어지면서 마음이 불편해져 결국 대궐에서 나와 사가로 돌아가기도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9월 21일(신사) 5번째기사</ref>. 그러나 이후에도 대간들의 봉성군 탄핵은 계속되었고<ref>《조선왕조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 명 가정(嘉靖) 24년) 10월 9일(무술) 2번째기사</ref>, 결국 봉성군은 이듬해인 [[1546년]](명종 원년) [[음력 9월 12일]] [[강원도]] 울진(蔚珍)<ref>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43557&mobile&categoryId=2453 네이버 지식백과 〈울진군〉] 참고</ref>으로 귀양을 갔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4권, 1년(1546 병오 / 명 가정(嘉靖) 25년) 9월 12일(병인) 3번째기사</ref>.
 
그러나 봉성군이 유배를 가던 도중 평창에서 병에 걸려 그곳에서 머물러 있음을<ref>《조선왕조실록》명종 4권, 1년(1546 병오 / 명 가정(嘉靖) 25년) 9월 27일(신사) 2번째기사</ref> 알게 된 [[조선 명종|명종]]은 그 유배지를 평창(平昌)<ref>지금의 [[강원도]] [[평창군]]이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65698&mobile&categoryId=2252 네이버 지식백과 〈평창군〉] 참고</ref>으로 옮겼고, 약과 의원을 보내어 이를 치료하게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명종 4권, 1년(1546 병오 / 명 가정(嘉靖) 25년) 9월 28일(임오) 5번째기사</ref>.
 
=== 양재역 벽서 사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