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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 시대 ====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지난 날 [[인목왕후]] 등의폐위 폐위에등에 동조했다 하여 그 처벌이 논의됐으나 [[조선 인조|인조]](仁祖)가 윤허하지 않아 무사할 수 있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6275&mobile&categoryId=200001080 두산백과 《인성군》]</ref>. 또 인조는 인성군을 항상 숙부(叔父)라고 부르며 예우를 하였다고 한다<ref name="guk"></ref>. 그러나 이 해에 출근하던 [[사헌부]]의 관리들이 길에서 자신을 보고도 피하지 않자 이를 문제삼고 감찰을 추고하도록 청하였는데, 이것이 [[헌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함부로 꾸짖고 욕보이는 바람에 또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이 때에도 인조의 비호 아래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2권, 1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8월 23일(신사) 1번째기사</ref>.
 
그러나 이듬해인 [[1624년]](인조 2년) [[음력 11월]]에 폐위된 [[조선 광해군|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올리고 인성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고변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7권, 2년(1624 갑자 / 명 천계(天啓) 4년) 11월 8일(무오) 2번째기사</ref>. 이로 인해 당시 수많은 대신들이 인성군의 유배를 주청하였으나, [[조선 인조|인조]]는 인성군이 역모를 주도한 무리에 가담한 흔적이 없어 벌을 줄 수 없다 하여 계속해서 처벌을 미뤘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7권, 2년(1624 갑자 / 명 천계(天啓) 4년) 12월 6일(병술) 1번째기사</ref>. 그러나 인성군의 유배를 주청하는 상소는 이듬해 [[음력 2월]]까지 수도 없이 계속되었고, 결국 이를 이기지 못한 인조는 [[1625년]](인조 3년) [[음력 2월 23일]] 인성군을 유배령을 내렸다. 다만 유배지에서도 그 거처를 편안하게 하고 물자도 부족하지 않게 공급하도록 명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8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2월 23일(임인) 1번째기사</ref>. 이틀 후인 [[음력 2월 25일]] 인성군은 [[강원도]] [[간성군]](杆城郡)에 안치되었는데, 이날 인조는 인성군의 아들 [[해평군|해평도정]](海平都正)에게 직접 인성군이 유배를 가게 된 사정을 말해줬을 뿐 아니라<ref>《조선왕조실록》인조 8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2월 25일(갑진) 1번째기사</ref>, 다음날에는 인성군에게 [[교자]](轎子)와 [[어의]], 호위병 등을 붙여주었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8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2월 26일(을사) 1번째기사</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