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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듬해인 [[1624년]](인조 2년) [[음력 11월]]에 폐위된 [[조선 광해군|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올리고 인성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고변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7권, 2년(1624 갑자 / 명 천계(天啓) 4년) 11월 8일(무오) 2번째기사</ref>. 이로 인해 당시 수많은 대신들이 인성군의 유배를 주청하였으나, [[조선 인조|인조]]는 인성군이 역모를 주도한 무리에 가담한 흔적이 없어 벌을 줄 수 없다 하여 계속해서 처벌을 미뤘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7권, 2년(1624 갑자 / 명 천계(天啓) 4년) 12월 6일(병술) 1번째기사</ref>. 그러나 인성군의 유배를 주청하는 상소는 이듬해 [[음력 2월]]까지 수도 없이 계속되었고, 결국 이를 이기지 못한 인조는 [[1625년]](인조 3년) [[음력 2월 23일]] 인성군을 유배령을 내렸다. 다만 유배지에서도 그 거처를 편안하게 하고 물자도 부족하지 않게 공급하도록 명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8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2월 23일(임인) 1번째기사</ref>. 이틀 후인 [[음력 2월 25일]] 인성군은 [[강원도]] [[간성군]](杆城郡)에 안치되었는데, 이날 인조는 인성군의 아들 [[해평군|해평도정]](海平都正)에게 직접 인성군이 유배를 가게 된 사정을 말해줬을 뿐 아니라<ref>《조선왕조실록》인조 8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2월 25일(갑진) 1번째기사</ref>, 다음날에는 인성군에게 [[평교자|교자]](轎子)와 [[어의]], 호위병 등을 붙여주었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8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2월 26일(을사) 1번째기사</ref>.
 
한편 이 해 [[음력 10월 18일]] 검열 [[목성선]](睦性善), 승문원 부정자 [[유석 (조선)|유석]](柳碩) 등이 인성군에게는 죄가 없으니 방면하라는 상소를 올렸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0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10월 18일(계사) 2번째기사</ref>. 게다가 전날인 [[음력 10월 17일]]에는 인성군의 유배지에 다녀온 아들 [[해평군|해평도정]]이 인성군의인성군이 병으로 고통스러워 함을 설명하자, [[조선 인조|인조]]는 인성군에 대해 석방을 명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0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10월 18일(계사) 3번째기사</ref>. 그러나 곧바로 대간에서 목성선의 상소가 잘못된 것이라고 연이어 반박을 해 대는 바람에<ref>《조선왕조실록》인조 10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10월 30일(을사) 2번째기사</ref>, 인성군은 석방되지 못하고 [[원주시|원주]](原州)로 이배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0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11월 15일(경신) 1번째기사</ref>. 이후 인조는 인성군에게 지속적으로 의원과 약, 옷감 등을 보내주었고<ref>《조선왕조실록》인조 13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7월 17일(정해) 1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인조 14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8월 9일(무신) 1번째기사</ref>, [[1626년]](인조 4년) [[음력 11월 1일]] 인성군의 생모 [[정빈 민씨]]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마침내 인성군을 석방토록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4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11월 1일(경오) 2번째기사</ref>.
 
그러나 불과 1년 여가 지난 [[1628년]](인조 6년) [[음력 1월 3일]], 당시 세마(洗馬) 허유(許逌) 등을 비롯한 이들이 일으킨 역모에 인성군도 참여했다는 고변이 또 들어왔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월 3일(을축) 4번째기사</ref>. 이때는 [[인목왕후]]까지 나서서 인성군의 처벌을 주청하였고<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월 20일(임오) 1번째기사</ref>, 종실들도 매일같이 [[조선 인조|인조]]를 찾아와 인성군의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월 20일(임오) 2번째기사</ref>. 결국 인성군은 [[음력 1월 21일]] [[전라도]] [[진도군|진도]](珍島)에 안치되었고, 다만 그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월 21일(계미) 2번째기사</ref>. 이후 대신들은 계속해서 인성군의 사사를 청하기 시작했고<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5월 2일(임술) 2번째기사</ref>, 결국 인조는 [[음력 5월 14일]] 인성군에게 자진할 것을 명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5월 14일(갑술) 1번째기사</ref>. 인성군은 6일 후인 [[음력 5월 20일]] 향년 4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ref name="guk"></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