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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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군의 사망 소식을 들은 [[조선 인조|인조]]는 그 장례를 예장하도록 하였으나, 이 역시 대신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예장(禮葬)<ref>"예를 갖추어 지내는 장사"를 뜻하나, 태상황, 황제, 황태자, 황태손 및 그 후비들의 장례를 뜻하기도 한다.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27509700 네이버 어학사전 〈예장〉] 참고</ref>"을 "후장(厚葬)<ref>"단순히 두터운 성의를 갖추어 지내는 장례"를 뜻한다.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43603300 네이버 어학사전 〈후장〉] 참고</ref>"이라고 이름을 바꾸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5월 29일(기축) 1번째기사</ref>.
한편 계속해서 유배지에 남아있던 인성군의 가족들은 [[1628년]](인조 6년) [[음력 5월 29일]] [[제주도]]로 이배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8권, 6년(1628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5월 27일(정해) 2번째기사</ref>. 이후
현재 인성군의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에 있다. 부인 윤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묘비 및 상석, 문인상, 망주석 등을 갖추고 있다. 인성군의 묘는 [[1986년]] [[3월 14일]] 의정부시의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53046&mobile&categoryId=200001157 두산백과 〈인성군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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