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교육: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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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국자감은 대체로 당의 국자감과 유사하였다. 차이점이었다고 한다면 학생 인원 측면이 있을 것이나, 이는 당시 인구 차이를 감안한다면 당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ref>당의 국자감 정원은 국자학 300인, 태학 500인, 사문학 1,300인이었다.</ref>. 다음으로 입학자격을 비교해 보면 특히 두 나라의 사문학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당의 사문학은 서민들에게까지 개방되었던 것에 비해 고려는 문무관 7품이상의 지위를 가진 자의 후손에 한하여 입학을 허락하였다. 이는 고려 국자감이 당의 국자감에 비해서 폐쇄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의 국자감 조직은 예종 4년(1109)에 국학에 7재(齋)가 설치되면서 변화하게 된다. ‘재’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반(班)과 같은 것으로서, 7재는 7개의 전공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7재의 상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 발전 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