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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사후 1주일 뒤에 호림산악회 회원 및 지인들이 사고 현장에서 추모등반 행사를 가졌다. 사후 1개월 뒤인 [[9월 17일]]에는 후학 및 민주화운동 동지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고현장에사고현장에서 추모비 제막식을제막식이 가졌다열렸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인용문2|오호 장준하 선생!
[[1985년]] [[8월]] '장준하선생 10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군사 정권이 붕괴되고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 [[4월 15일]] 제1회 한신상이 추서되었다.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빼앗긴 민주주의 쟁취, 고루 잘 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평화,
통일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이 맨 손으로 돌을 파 비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 풀뿌리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리라.}}
 
[[1985년]] [[8월]] '장준하선생 10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군사 정권이 붕괴되고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이후인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 [[4월 15일]] 제1회 한신상이 추서되었다.
 
[[1995년]] [[8월 16일]] 20주기 추모행사 및 추모문집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1999년]] [[11월 1일]]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