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 임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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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입궁했는지는 그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613년]](광해군 5년)에 이미 그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입궁한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은 고례를 어기면서까지 수많은 후궁을 두었고 그로 인한 폐해도 심각했으나<ref>《조선왕조실록》광해 130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7월 5일(신묘) 14번째기사</ref>, 결국 마지막까지 함께 한 후궁은 4~5명에 불과하였고, 임씨는 그 중 한명이었다. 특히 임씨는 용모가 매우 뛰어나고 아첨을 잘 하여, 계략이 뛰어난 [[김개시]](金介屎) 및 문서 처리 능력이 훌륭했던 [[소용 정씨]](昭容 鄭氏) 등과 함께 광해군의 총애가 "후궁에서 으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ref>《조선왕조실록》광해 73권,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12월 30일(계축) 2번째기사</ref>.
 
한편 임씨는 [[인조 반정]]이 일어나 [[조선 광해군|광해군]]이 폐위되자, [[조선 인조|인조]](仁祖)의 명에 따라 광해군의 유배지에서 함께 있으면서 그 시중을 들었다<ref>《조선왕조실록》광해 187권, 15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3월 13일(계묘) 8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인조 1권, 1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3월 25일(을묘) 1번째기사</ref>. 이후 그녀에 대해 폐주의 후궁이라 하여 사사가 논의되었으나, 광해군 재위 시절 [[이귀]](李貴)와 [[김자점]](金自點)이 고변을 당할 때 두 사람을 옹호한 공이 있어 죽음을 면하고 계속 해서 광해군의 곁에서 그 시중을 들 수 있었다<ref name="non"></ref>.
 
임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남편 [[조선 광해군|광해군]]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