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미치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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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인으로 입후보해 처음으로 당선된 후, 11선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일생 동안 의원 직에 있었다. 1976년부터 1977년까지 [[후쿠다 다케오]] 내각의 후생장관, 1978년부터 1979년까지 제1차 [[오히라 마사요시|오히라]] 내각의 농림수산대신,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스즈키 젠코]] 내각 및 스즈키 젠코 개조 내각의 재무대신,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제2차 [[나카소네 야스히로|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 내각의 통산대신을 지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일본의 부총리 및 외무대신을 지냈으며, 1995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맏아들 [[와타나베 요시미]] (渡辺 喜美, 1952년 ~) 는 현재 정치인으로 활동 중이다.
 
한편 와타나베는 정계에서 활동하는 동안 '미국의 흑인들은 빚을 지고도 너무 무책임하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비참하게 살고 있다', '한국은 1910년 한일 합병에 동의했다' 등의 여러 차례 문제 발언으로 자신의 정치적 업적을 스스로 훼손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6a2193n2 한국 브리태니커:와타나베 미치오에서 인용한 부분]</ref> 그의 맏아들 [[와타나베 요시미]] (渡辺 喜美, 1952년 ~) 는 현재 정치인으로 활동 중이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