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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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llang|de|Stefan Zweig}}, [[1881년]] [[11월 28일]] ~ [[1942년]] [[2월 22일]])는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저널리스트]]·[[극작가]]·전기작가이다.
[[빈]]에서 태어났으며<ref name="Lohrmann2003">Prof.Dr. Klaus Lohrmann ''"Jüdisches Wien. Kultur-Karte"'' (2003), Mosse-Berlin Mitte gGmbH (Verlag Jüdische Presse)</ref>,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가 정권을 잡자 [[브라질]]로 망명하였다가 마지막 작품인 《발자크》를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페트로폴리스]]에서 젊은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형식적 완성미가 풍부하고,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응용하여 쓴 우수한 단편 소설들이 많다. 작가 유럽 문화의 전통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고, 대표작으로 《감정의 혼란》이 있다.
 
== 생애 ==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섬유]] 공장 대표인 아버지 모리츠 츠바이크와 [[유대인|유대계]] 은행가 가문 출신인 어머니 이다 브레타우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빈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1904년]] ‘이폴리트 테느의 철학’이라는 논문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학업에서 종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그의 소설 《책벌레 멘델》에서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는 등 자신의 [[유대교]]적 신념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의 에세이 작품들이 [[시오니즘]]을 선도하는 [[테오도어 헤르츨]]이 운영하는 《신 자유신문》(''Neue Freie Presse'')에 실리기는 하였지만, 츠바이크는 헤르츨의 유대적 민족주의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체코]]의 작가 에곤 호스토프스키와 친했다. 호스토프스키는 츠바이크와의 관계를 ‘먼 친척되는 사이’라고 묘사하곤 했는데<ref>“Egon Hostovský: Vzpomínky, studie a dokumenty o jeho díle a osudu”, Sixty-Eight Publishers, 1974</ref>, 몇몇 매체는 그들의 사이를 사촌이라고 표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애국주의적 정서가 확대되었고, 이는 츠바이크뿐만 아니라 [[마르틴 부버]], 헤르만 코엔과 같은 독일인과 오스트리아계 유대인들도 지지를 보내는 등 널리 퍼져나갔다<ref>Elon, 320</ref>. 비록 츠바이크는 이에 동조하기는 하였지만,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거부하였고, 대신에 국방부 기록 보관소에서 근무하였다. 하지만 곧 그는 [[19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그의 친구 [[로맹 롤랑]]과 함께 [[평화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츠바이크는 인생 전반에 걸쳐서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유럽]]의 통합을 지지했다. 롤랑처럼 츠바이크 또한 수많은 《에라스무스 평전》과 같은 전기문을 많이 썼다.
 
[[1934년]] 츠바이크는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이 힘을 떨치자 이를 피해 아내 로테 알트만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나 [[런던]]으로 피신하였다. [[1940년]] [[나치]] [[군대]]가 [[프랑스]]를 거쳐 [[서유럽]]으로 빠르게 진군하자 츠바이크 부부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으로 옮겼다. 같은 해 [[8월 20일]] 다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위성 도시인 [[페트로폴리스]]로 옮겼다<ref name=DW_30.04.2009>{{언어고리|en}} {{cite news|url=http://www.dw.de/dw/article/0,,4210755,00.html|title=Revivendo o país do futuro de Stefan Zweig|author=Júlia Dias Carneiro|publisher=도이체 벨레 |quote=|date=April 30, 2009|accessdate=February 23, 2012}}</ref>. 편협한 사고와 [[권위주의]] 그리고 [[나치즘]]에 의해 그의 [[우울증]]은 깊어져만 갔고, 인류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감을 느낀 츠바이크는 그의 자포자기인 심정을 노트에 적었다. 결국 츠바이크 부부는 [[1942년]] [[2월 23일]]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그들의 집에서 손을 잡고 죽은 채 발견되었다<ref name="Time1942"> {{cite news|http://select.nytimes.com/gst/abstract.html?res=F70815FA3A5F167B93C6AB1789D85F468485F9&scp=10&sq=Stefan%20Zweig&st=cse|title=Stefan Zweig, Wife End Lives In Brazil|author=|publisher=뉴욕 타임스 |quote=Stefan Zweig, Wife End Lives In Brazil; Austrian-Born Author Left a Note Saying He Lacked the Strength to Go on - Author and Wife Die in Compact: Zweig and Wife Commit Suicide |date=February 23, 1942|accessdate=February 23, 2012}}</ref><ref>{{언어고리|en}} {{cite news |author= |coauthors= |title=Died |url=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773116,00.html |quote=Died. Stefan Zweig, 60, Austrian-born novelist, biographer, essayist (Amok, Adepts in Self-Portraiture, Marie Antoinette), and his wife, Elizabeth; by poison; in Petropolis, Brazil. Born into a wealthy Jewish family in Vienna, Zweig turned from casual globe-trotting to literature after World War I, wrote prolifically, smoothly, successfully in many forms. His books banned by the Nazis, he fled to Britain in 1938 with the arrival of German troops, became a British subject in 1940, moved to the U.S. the same year, to Brazil the next. He was never outspoken against Naziism, believed artists and writers should be independent of politics. Friends in Brazil said he left a suicide note explaining that he was old, a man without a country, too weary to begin a new life. His last book: Brazil: Land of the Future.|work=[[Time magazine]] |date= March 2, 1942|accessdate=2010-06-30 }}</ref>.
 
== 작품 경향 ==
슈테판 츠바이크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최고 유명 작가였다. 또한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미국]], [[남미]] 그리고 [[유럽]] 대륙에서 유명했다. 하지만 그는 [[영국]] 출판계에서는 무시당했는데, 곧 [[미주]]에서의 명예가 줄어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부터 미국의 몇몇 유명 출판사에서 그의 작품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은 극과 극으로 나뉘는데, 혹자는 그의 문체가 가볍고, 피상적이라면서 부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하며, 혹자는 그의 [[인문주의|휴머니즘]]과 간결하지만 설득력 있는 문체가 [[유럽]]의 전통에 더욱 더 매료되게 한다며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한 때, 츠바이크는 반(反) 독일 감정이 확대되자 자신의 이름인 슈테판 츠바이크를 영어로 그대로 번역한 스테픈 브랜치(''Stephen Branch'')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는 [1938년]] [[미국의 영화|헐리우드 영화]]로 제작되었다.
 
츠바이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는데, 슈트라우스에게 [[오페라]] 《말없는 여자》(''Die schweigsame Frau'')의 대본을 제공하기도 했다.
 
 
== 주석 ==
<references/>
 
== 바깥 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