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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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대한 제국을 한번에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삼았다가 이듬해 바로 정제(Augustus) 승격시킨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동방의 문제를 관할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제국 서방을 책임지는 형태였다. 293년 두 명의 정제 외에 두 명의 부제를 더 두어 사두정치 체제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정치적인 체제를 [[테트라키]] (사두정치 체제.Tetrarchia)라고 한다.
 
테트라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죽음과 함께 붕괴되었고, 콘스탄티우스의 군대는 즉시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정제로 옹립하였다. 이후 연속적으로 일어난 내전을 종식시킨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크리스트교를[[기독교]]를 공인하였다. 330년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움을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337년, 그가 죽자 비잔티움은‘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개명되었다. 361년 [[율리아누스]]가 황위에 올랐다. 그는 기독교에[[로마 가톨릭교회]]에 박해를 가하였으며 신플라톤 철학과 미트라교에 의한 이교의 부흥과 개혁을 기도하였다. 율리아누스는 또한 [[사산 왕조|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와 전쟁을 벌였으며,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363년 죽었다. 그러자 [[요비아누스]]가 군대에 의하여 황제로 추대되었다. 황제가 된 뒤, 샤푸르 2세와 로마군의 무사귀환을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대가로 [[297년]] [[갈레리우스]]에 의해 로마령이 된 싱가라(지금의 [[이라크]] 신자르)와 니시비스(지금의 [[터키]] 누시이빈), 아미다 등의 도시와 티그리스강 동쪽의 로마 영토 전부를 양도하였다. 요비아누스는 크리스트교의 권한을 회복시켜 주었으나, 364년 사망하였다.
 
요비아누스가 죽자,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정제로 추대되었고, 가까운 친척<!--(동생이라고도 한다.)-->인 [[발렌스]]가 그를 도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365년 장군 [[프로코피우스]]는 이에 불복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367년 발렌스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367년]] 8살의 [[그라티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제국 서부의 공동 황제에 추대되었다. 374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게르만 족]]에 대해 군사적인 압박을 가하다 죽었다. 16세의 그라티아누스는 단독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군대는 그의 어린 이복 동생인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부 로마의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고, 그라티아누스는 이에 복종했다<!--([[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 이야기]]에는 [[그라티아누스]]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부 로마의 공동 황제로 즉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