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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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대원군|흥선군 이하응]]의 어린 둘째 아들이 [[조선 순조|순조]]의 양자로 하여금 왕위에 올라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되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서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세도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였다. 가장 말썽이 많던 환곡 제도를 [[사창제]]로 전환시켰고,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은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또한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서원]]들을 대부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샀다.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시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재정을 투입하였다. 경복궁의 중건 외에도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 각 관서 및 도성, 그리고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로써 황폐해졌던 [[서울]]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그것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 [[당백전]]으로 인한 엄청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파일:Taewongun photo.jpgjpeg|thumb|right|200px|[[흥선대원군]]의 초상화]]
흥선대원군이 [[로마 가톨릭]]을 탄압하면서 프랑스인 [[신부 (기독교)|신부]]들을 처형한 것을 구실 삼아 1866년, [[프랑스 제2제정|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조선에 대해 사과와 손해 배상, 그리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여러 곳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결국 프랑스군은 수많은 재물을 약탈한 뒤 철수하였다([[병인양요]]). 이로부터 5년 뒤, 이번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인들은 1866년 미국 상인이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사과와 통상 교섭을 요구하여 왔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였고, 그들은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에 못 이겨 결국 물러가고 말았다([[신미양요]]).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후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 적혀 있는 척화비(斥和碑)가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이후 강력한 쇄국 정책으로 서양과의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여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절에는 외세가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