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아이 히로미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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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979년, 프로 입단할 당시의 롯데 감독이었던 [[야마우치 가즈히로]]는 레벨 스윙의 본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면서 어퍼 스윙이었던 오치아이의 타격폼 교정에 착수했다. “호스로 물을 뿌리는 느낌으로 칠 수 있다”등의 조언을 받았지만 오치아이 본인은 후에 “당시 자신에게는 야마우치 감독의 고도의 타격 이론을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말한대로 야마우치 감독으로부터 배운 타법에서는 공이 앞으로 날아가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베테랑 포수인 [[도이 겐지]]의 매우 부드러운 손목을 사용하고 공을 튕겨 되돌리는 폼에 주목하여 그것을 흉내내는 등 아류의 폼 개조를 노렸다(이것이 오치아이가 '''오레류'''({{lang|ja|オレ流}})라고 불리는 대목이다).
 
타격 코치인 [[다카바타케 미치히로]]는 오치아이의 손목을 사용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어 1980년 요미우리에서 이적해 온 [[장훈|하리모토 이사오]]의 밑에서 오치아이를 데려갔다. 하리모토는 레벨과 어퍼의 타격 이론을 주장하는 타자이지만 의외의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훌륭하다. 그 상태에서의 스윙으로는 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카바타케 코치로부터 오치아이는 구종을 읽는 테크닉을 배웠다. 그러나 결코 오치아이와 야마우치 감독과의 관계가 나빴던 것이 아니고 오치아이는 야마우치 감독으로부터 전수 받은전수받은 타격 연습법(커브 머신을 바로 정면에 두고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공을 왼쪽으로 반격한다고 하는 것으로 왼쪽 옆구리를 잡고 벽을 만드는 연습 등)을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실행에 옮겼다. 그 후 완성된 [[신주 타법]]을 개조하면서 야마우치 감독으로부터 배운 것이 자신의 배팅에도 살아 있는 것을 알아내어 야마우치 감독도 오치아이의 타격 3관왕 축하 파티에서 “오치아이는 입단했을 때 좋은 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늘 곁에서 지도했다”라고 이 같이 말해 야마우치와 오치아이 두 사람은 서로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입단 초에는 스프링 캠프에 있던 야구 평론가들은 모두 오치아이의 타격폼에 대한 혹평을 내렸는데 특히 전임 감독이던 [[가네다 마사이치]]는 오치아이의 타격폼을 혹평했다. 오치아이는 이 때의 생각을 “만약 고교 출신의 젊은 선수가 프로에 들어가면서 저렇게 훌륭한 사람으로부터 갑자기 말해지면 무너졌을 것이다” 라고 종종 말했다. 이 일은 후에 가네다가 회장을 맡고 있던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의 가입을 거부한 원인이 되면서 입단 2년차 때에는 “장래에 비록 2000개의 안타를 쳤다고 해도 명구회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라고 단언했다.
 
입단 2년째인 1980년, 2군에서 조정하던 중에 [[에가와 스구루]]로부터 홈런을 기록했고 이후 5경기 연속 홈런을 때려내 [[이스턴 리그 (일본)|이스턴 리그]]에서의 신기록을 만들었고만들었다. 그리고 시즌 후반기에는 1군에 복귀하면서 57경기에 출전해 15개15개의 홈런을 날리는 등 팀의 주전을 차지했다. 같은 해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스|긴테쓰 버팔로스]]와의 [[1980년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에 출전하는 등 처음으로 포스트 시즌 출전을 경험했다.
 
이듬해 1981년에는 올스타전에 첫 출전을 하면서 당시 퍼시픽 리그 팀의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에게서 “장래에 10년, 15년 후에 일본 프로 야구를 짊어질 선수다”라고 인정받아 선발에서선발에서는 4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정규 시즌에서는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워 3할 2푼 6리의 시즌 최고 타율을 기록하는 등 프로 데뷔 첫 타이틀인 [[일본 프로 야구 수위 타자|수위타자]] 타이틀을 석권했다. [[아리토 미치요]], [[레온 리]], [[레론 리]] 등과 함께 클린업 타선을 이끌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닛폰햄 파이터스]]와의 [[1981년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에서는 4차전에서 홈런을 때려내는 등때려내 구단 역사상 마지막이 되는 포스트 시즌에서의 승리에 기여했다.
 
이듬해 1982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로 타격 3관왕을 차지해 숫자로서는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타율 3할 2푼 5리, 32홈런, 99타점) 야구 평론가인 [[도요다 야스미쓰]]는 이에 대해 “3관왕의 수준은 아니었다”라고 비판했다. 1983년에는 타율 3할 3푼 2리를 기록하여 3년 연속 수위타자를 석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