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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sahi19370820.jpg|thumb|left|200px|구마모토 공업학교 재학 당시 가와카미를 소개하는 [[아사히 신문]]의 당시 보도 내용들]]
 
입단 당시에는 투수로서 등록되어 있었지만, 구위력이 부족하게 자타가 모두 인정하는 ‘연투파’(軟投派)타입이었다. 감독인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가와카미의 타격 플레이에 주목하면서 간판 타자로 키울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팀으로서는 투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투수도 같이 겸임시켰다. 구마모토 공업학교 시절의 배터리를 짜고 있던 요시하라가 개막 경기에서는 신인으로서 선발 멤버로 출전하였고 역시 입단 동기인 지바가 [[2루수]]로서 활약하고 있는 것을 보며 “빨리 타격에 전념하면 좋겠지만….” 이라고 말했다. 춘계 시즌(당시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춘계와춘계 시즌과 추계 추계를시즌으로 나눠 양대 시즌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에서 가와카미는 투수와 타자 양쪽 모두에서 기용되었지만 모두 성적은 좋지 않았다.
 
가와카미가 야수로 전향한 것은 춘계 시즌이 종료되면서끝나면서 추계 시즌에시즌이 들어가기 전에 열렸던 여름에 있은 시범경기였다. 당시 [[1루수]]였던 [[나가사와 후지오]]가 갑작스런 부상으로 선발 명단에서 제외돼 급거 1루수로서 출전한 경기에서경기에서는 3안타의3안타를 맹활약을때려내는 보이는등의 맹활약으로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으로부터 “1루수용 미트를 준비하라”라고 말한 뒤 이를 건네받고 가와카미는 매우 기뻐했다. 그 해의 추계 시즌부터 주전 1루수로서 뛰게 되었다. 이듬해 1939년부터는 [[내야수]]로 등록되지만 1941년까지는 투수도 겸임하고 있었다.
 
1939년부터 단일 시즌제로 돌아오면서 가와카미는 그 해에 수위타자를 석권했다. 이후 1941년에도 수위타자를 차지했고 ‘투수로서 4번’의 선발 출전을 세 차례나 기록하고 있어 1939년 4월 10일의 난카이전에서는 투수로서 출전하는 등 5안타를 기록했다. 1944년에 징병되어 다치카와 항공정비대의 교관(육군 소위)으로 있을 때에 내지에서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