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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생애 초반 ===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무학의 부모는 왜구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하층민으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았고, 이러한 사정으로 무학의 어렸을 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8세에 [[송광사]]에 들어가 [[소지 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문산]](龍門山)의 [[혜명 국사]]로부터 불법을 전수받고<ref>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년, ISBN 8901047543, 44쪽</ref>,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하였다.<ref name="글로벌-무학"/> [[1353년]]([[공민왕]] 2년)에 [[원나라]]의 [[연경]]에 유학하여 [[인도]]의 [[지공]](指空)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ref name="글로벌-무학"/> 원나라에 있는 동안 [[우타이 산|오대산]](五臺山) 등 [[중국]]의 각지를 순례하였다.<ref name="글로벌-무학"/> [[나옹 혜근]]을 만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고려]]로 돌아왔다.<ref name="글로벌-무학"/>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무학의 부모는 왜구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하층민으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았고, 이러한 사정으로 무학의 어렸을 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어린 그가 지나치게 못생겨서 내다 버렸으나 학들이 와서 아이를 감싸므로 그의 부모는 그가 특별한 아이라 생각하여 도로 데려왔다 한다.
 
=== 출가와 승려 생활 ===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무학의 부모는 왜구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하층민으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았고, 이러한 사정으로 무학의 어렸을 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8세에 [[송광사]]에 들어가 [[소지 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문산]](龍門山)의 [[혜명 국사]]로부터 불법을 전수받고<ref>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년, ISBN 8901047543, 44쪽</ref>,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하였다.<ref name="글로벌-무학"/> [[1353년]]([[공민왕]] 2년)에 [[원나라]]의 [[연경]]에 유학하여 [[인도]]의 [[지공]](指空)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ref name="글로벌-무학"/> 원나라에 있는 동안 [[우타이 산|오대산]](五臺山) 등 [[중국]]의 각지를 순례하였다.<ref name="글로벌-무학"/> [[나옹 혜근]]을 만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고려]]로 돌아왔다.<ref name="글로벌-무학"/>
 
1364년 나옹은 [[회암사]]를 중건하고 무학을 불러 수좌승으로 삼았다. 나옹이 사망한 뒤에는 무학은 전국을 돌며 수행하였는데, 이 때 [[이성계]]와 처음 만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ref>이이화, 《역사 속의 한국불교》, 역사비평사, 2002년, ISBN 8976962613, 257쪽</ref>
 
=== 역성혁명에 동참 ===
무학은 일찍이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여 [[석왕사]](釋王寺)를 짓게 해준 인연으로 [[이성계]]의 우우(優遇)를 받았으며, 상지술(相地術)에 밝았다고 한다.<ref name="글로벌-자초"/> [[연려실기술]]에는 무학의 해몽과 한양 천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으나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미흡한 점이 많다.<ref>이이화, 《역사 속의 한국불교》, 역사비평사, 2002년, ISBN 8976962613, 260쪽</ref>
 
[[1392년]]([[조선 태조]] 1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고 '''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았으며 [[회암사]](會巖寺)에 있었다.<ref name="글로벌-무학"/><ref name="글로벌-자초"/> 개국 다음해에직후부터 태조는 도읍지를 옮기려 했다. 수도를 옮기려는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도읍을 정하는 것에 의견을 내었다.
 
{{인용문|(계룡산에 올라)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으니, 자초는 대답하였다.“능히 알 수 없습니다.”|[[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계유 2월 11일의 기사}}
{{인용문|(남경의 옛 궁궐터에서) 임금이 또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었다.“어떠냐?”자초가 대답하였다.“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이에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경상·전라·충청·강원·풍해·경기좌·우도의 민정(民丁)을 선발하여 성쌓는 공사를 하게 하였다.|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갑술 8월 13일의 기사}}
 
==== 수도 이전 ====
태조는 무학을 매우 신임하였다. 1393년 회암사에 역질이 돌자 무학의 건강을 염려하여 광명사로 옮기도록 하였고<ref>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계유 7월 19일 두번째 기사</ref> 1397년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탑을 [[회암사]] 북쪽에 세워주었다.<ref name="글로벌-자초"/> 또한 태조 자신도 왕위를 물려준 뒤 회암사에서 지내기도 하였다.<ref>박경남, 《우리겨레 문화유산. 3: 인천 경기도 강원도》, 삼성당, 2009년, ISBN 8914017036, 72쪽</ref>
두 번째 새 도읍 후보지는 한양이었다. 왕사 무학대사가 어명을 받고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ref name="chung161">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61페이지</ref> 무학은 [[삼각산]]에 이어 [[목멱산]](木覓山, 지금의 서울 남산)에 올랐다. 이곳이 적당하다고 쾌재를 부르는 순간,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과 꼭 같구나.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아가다니, 이럇!' 무학은 노인을 쫓아가 길지를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노인은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면 알 일이다.<ref name="chung161"/>'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무학은 그대로 태조에게 길지를 보고하였다.
 
무학이 노인의 말을 쫓아 가보니,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다시 삼각산을 거쳐 [[백악산]] 밑에 도착한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 용호(龍虎)를 삼는 이곳을 궁궐터로 정하고 태조에게 아뢰었다.<ref name="chung161"/> 태조는 무학의 말을 듣고 그 길지로 향하고 그곳을 궁궐터로 정하였다.
 
그런데 무학의 의견에 [[정도전]]이 반대하고 나섰다.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ref name="chung161"/>'라며 반대하였다.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다시 잡은 자리가 [[북악산]] 밑, [[경복궁]] 자리였다. 본래 무학이 잡은 자리는 종로의 필운동 근처였다.<ref name="chung161"/>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1394년]](태조 3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천도를 명령했다.<ref name="chung161"/>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ref name="chung161"/>
 
=== 생애 후반 ===
[[파일:Stale of Great Monk Muhak.jpg|thumb|무학대사비]]
 
태조는 무학을 매우 신임하였다. 1393년 회암사에 역질이 돌자 무학의 건강을 염려하여 광명사로 옮기도록 하였고<ref>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계유 7월 19일 두번째 기사</ref> 1397년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탑을 [[회암사]] 북쪽에 세워주었다.<ref name="글로벌-자초"/> 또한 태조 자신도 왕위를 물려준 뒤 회암사에서 지내기도 하였다.<ref>박경남, 《우리겨레 문화유산. 3: 인천 경기도 강원도》, 삼성당, 2009년, ISBN 8914017036, 72쪽</ref>
 
그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이가 소원해진 태조와 태종 부자의 화해를 위해 여러번 함흥과 한성을 오갔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태조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무학은 [[조선 태종]] 2년([[1401년|1401]])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사직하였고,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1405년|1405]]).<ref name="글로벌-자초"/> 사망 후 [[조선 태종|태종]]의 명으로 [[무학대사비]]가 건립되었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1&Num=48 회암사 무학대사비],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 시스템</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