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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5년(서기 [[22년]]) 2월에 [[부여]]를 정벌하여 [[대소왕]]을 죽였다. [[대소왕]]의 6형제 중 막내동생은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무리 100여 인과 함께 [[압록곡]](鴨淥谷)에 이르렀다. 거기서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드디어 그를 죽이고, 백성을 빼앗아 [[갈사수]](曷思水) 가에 도읍을 정하고 [[갈사부여]]를 세워 왕이 되었다.<ref>[[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고구려 본기〉 제2,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2010년, 348쪽.</ref> 이 때가 [[고구려]] [[대무신왕]] 5년(서기 [[22년]]) 4월이었다. [[갈사왕]](曷思王)은 자신의 손녀를 [[고구려]]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으로 삼게 하여, 나중에 [[왕자]] [[호동]]을 낳았다.
 
한편 [[갈사왕]]의 사촌동생은종제(從第, <small>사촌동생</small>)는 [[고구려]] [[대무신왕]] 5년(서기 [[22년]]) 7월에 부여 사람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대소왕]]이 죽고 [[부여]]가 망하자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고, [[대소왕]]의 동생({{해석|[[갈사왕]]}})은 도망하여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고,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부여]]를 부흥시킬 수 없다"<ref>[[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고구려 본기〉 제2,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2010년, 348~349쪽.</ref>고 투항한 이유를 말하였다. 이에 [[고구려]] [[대무신왕]]은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어 [[락씨]](絡氏)라는 성을 내리고<ref>[[이종휘]] 저, 김영심 정재훈 역주, 《[[동사 (이종휘)|동사]]》, 소명출판, 2004년 12월 30일, 61쪽.</ref> [[부여왕]]으로 봉한 후 [[고구려]] [[연나부]](掾那部)에 거주하게 하였다.
 
갈사부여의 2대왕은 [[갈사왕]]의 아들로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갈사부여의 3대왕은 [[갈사왕]]의 손자인 [[도두왕]](都頭王)이다. [[고구려]] [[태조대왕]](太祖大王) 16년(서기 [[68년]])에 [[도두왕]](都頭王)은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바치고 [[우태]](于台 또는 優台)라는 벼슬을 받았다.<ref>[[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고구려 본기〉 제3,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2010년, 361쪽.</ref> 이로써 갈사부여는 멸망하고 [[고구려]]에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