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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 시대 ===
[[1872년]] 1월 8일 사면으로 출옥한 후, 새 정부에 출사하여 좌원 소의관, [[홋카이도 개척사]] 5등직을 거쳐 대장소승직을 겸임하여 미국, 유럽 각국을 개척 기계의 시찰과 공채 발행 교섭 목적으로 순방했다. [[1874년]] 3월에 귀국한 후, 홋카이도 개척사로 복귀하였으며 후에 육군 대령 배명을 거쳐 [[공부성]] 4등직이 되었다. 기술관료로서 식산 흥업 정책을 세웠고, 공작국장으로서 관영 공장을 총괄하여 [[시멘트]]나 [[유리]], [[조선]], [[방적]] 등의 사업을 추진하는 등 인프라 개발에도 관여했다. 또 [[내국권업박람회]]의 심사원으로서도 활동했으며, 《공업신보》나 《[[댐|언제]]축법신안》 등을 쓰거나 번역하고, 일본에 [[댐]] 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1877년]] 공부대학교가 발족되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881년]] 12월 3일 공부 기감에 승진되었는데, 이는 칙임관으로 당시 기술자로서 가장 높은 직위에 해당했다. 같은 해 [[도쿄 학사회원]] 회원에도 임명되었다. [[1885년]] 12월 28일에는 원로원 의관에 취임했고, [[1886년]] [[가쿠슈인]] 원장 겸 [[가쿠슈인 여자 대학|가조쿠 여대학]] 교장, [[1889년]] 주[[청나라|청국]] 특명전권공사를 지내고 [[1993년1893년]] 7월 [[조선]] 공사도 겸임하게 되어 같은 해 6월에 조선에 부임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에 들어갔으며, 이로 인해 [[청일 전쟁]]이 발생하였다. 결국 1894년 10월 11일에는 공사에서 해임되었다. 귀국 후 같은 해 11월 10일 추밀고문관이 되었으며, [[1900년]] 5월 9일 남작 직위를 받았다.
 
말년에는 [[오다와라 해일]]의 피해를 입었다. [[1911년]] [[가나가와 현]] 고즈의 별장에서 [[식도암]]으로 78세의 나이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