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륜성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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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 아시아]]에서는 왕의 정식 명칭의 일부로 쓰이거나 [[아유타야 왕조]]의 차크라 파트 왕처럼 현지어로 와전되기도 했지만, 직접적으로 그 말이 이름에 쓰이기도 했다. 《대반야바라밀경(大般若波羅蜜多經)》에도 이 말이 있다. [[티벳 불교]] 지역권에서는 [[원나라|원(元)]]의 [[쿠빌라이]]나 [[북원|북원(北元)]]의 [[알탄 칸]], [[청나라|청(淸)]]의 역대 [[청나라의 황제|한(汗)]]들이 으레 전륜성왕으로 비유되곤 했다.
 
한국의 역사에서 전륜성왕을 지향한 것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군주로는 [[신라|신라(新羅)]]의 [[진흥왕|진흥왕(眞興王)]]을 꼽을 수 있다. [[경주시|경주(慶州)]] [[황룡사지|황룡사(黃龍寺)]]의 창건설화에도 보이듯 아소카 왕을 전륜성왕의 모델로 삼았던 진흥왕은 두 왕자에게도 각각 동륜성왕과 철륜성왕을 가리키는 '동륜(銅輪)'과 '[[진지왕|사륜(舍輪)]]'이라는 이름을 주었다.<ref>박창화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記)》에는 진흥왕의 공주는 이름을 은륜(銀輪)이라 했다는 기술이 있다.</ref>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스스로 출가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소카 왕도 말년에 승려로서 출가하였다는 전승과의 관련을 지적하는 설이 있다.<ref>아소카 왕을 전륜성왕과 동일시하고 그의 행적과 통치 방향을 본받는데서 전륜성왕을 지향하려 했다는 관점에서는 《삼국유사》권제3 흥법(興法)조에 나오는 요동의 육왕탑(育王塔)과 고구려 성왕(聖王)이나, 백제의 29대 법왕(法王)이 재위년과 2년에 전몰장병을 위해 오합사를 짓고 금살령(禁殺令)을 내린 사실을 아소카 왕의 정책과 연관지어, 신라와 마찬가지로 백제ㆍ고구려 역시 일찍부터 '전륜성왕' 관념을 수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윤세원, 위의 논문, p.187~194.</ref>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