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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십년의 지방 근무 후, 중앙에 복귀 간관에 임명된다. [[범중엄]] 등과 경력의 개혁을 진행하다가 인종의 신임를 잃게 되고, 1045년 (경력 5년)에는 비방을 받아 [[안후이 성]]의 지사로 또 한번 좌천되었다.
 
몇 해 후에 다시 한번 중앙에 복귀하여 한림학사 등 요직을 역임한다.1054년 수년 만에 구양수를 만난 인종은 그의 노쇠한 외모와 상황을 측은히 여겨 극진히 대우하며 이부(吏部)의 유내전(流內銓)에 임명한다. 1057년 (가후 2년) 권 지례 부공거에 오르고, 1058년에는 [[포증]]에 이어 개봉 부윤의 임무에 종사한다. 또한 과거 시험을 감독하여 [[소식]]을 발굴해 낸다. 당시 구양수의 정적들은 그의 기용에 두려움을 느끼고 각종 모함과 구설수를 만들었지만, 구양수는 지속적으로 경사에 머무르며 <당서(唐書)> 편찬에 참여하게 되고 한림학사 겸 사관수찬(翰林學士兼史館修撰)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 후 추밀부사, 삼지정사(부재상)에 오르고, [[소순]], [[왕안석]] 등을 등용했다. [[왕안석의 신법]]을 전부터 지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신법이 실시되자 역으로 [[청묘법]]에 대해 엄격한 논고를 지켜보는 등 가장 강력한 반대파의 한 사람이 되어 정계를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