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제 무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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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는 또한 교적관(校籍官)을 시켜 호적을 조사하고 정리하였다. 수년에 걸친 토지 조사 및 호적조사로 부정부패 때문에 토지를 빼앗기고 국경 근처에서 떠돌던 많은 백성들이 호적에 복귀하였다. 무제는 중서사인 채법량, 여문도를 시작으로 한족 문인 출신의 인재를 등용하여 귀족을 제압했다. 이로 인해 귀족의 지지는 잃어버렸으나, 치세 전반에 걸쳐 백성들의 삶은 윤택해지고, 도시가 번영하였다는 평이 전해졌다. 무제의 치세는 영명의 치(永明의 治)라 불렸으나 무제 사후 후계자 쟁탈전이 벌어져 11년간 계속된 뒤 2명의 어린 군주들의 짧은 재위을 거쳐 [[제 명제|명제]]가 즉위했다. 그 사이 북위에게 산동을 포함한 회하 이북을 빼앗기고 말았다.
 
== 가계도 ==
 
 
== 주석 ==
 
{{전임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