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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스라 --> 만수라, 5월 18일 --> 5월 14일
(샤자르 알 두르)
(만스라 --> 만수라, 5월 18일 --> 5월 14일)
[[1242년]] 바이바르스는 몽골군의 포로가 되어 노예상인의 손에 넘어갔다. 신체적 특징 때문에 아무도 사지 않았지만 마술에 뛰어났기에 [[아이유브 왕조]]의 귀족이 그를 사서 술탄 [[살리흐|앗 살리흐 나짐 앗 딘 아이유브]]의 맘루크군에 편입되었다. 그후 출세을 거듭해 술탄의 경호대장이 되었다.
 
맘루크 군인으로 최초의 활약은 [[1249년]] [[프랑스의 루이 9세]]에 의한 [[제7차 십자군]] 때였다. 이집트는 술탄 사리프가 병으로 인해 군의 통제가 어려워지게 되자, 그때 맘루크 군단에서 부재한 군단장을 대신하여 지휘를 맡은 바이바르스가 분전하여 [[1250년]] [[만스라만수라 전투]]에서 루이 9세를 격파하고 그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그때 이집트에서는 술탄 살리흐가 죽고, 이집트 지배자는 [[투란 샤]], [[샤자르 알 두르]], 술탄 [[아이바크]]순으로 지배자가 바뀌어갔다. 맘루크에 대해 반항등을 거쳐 술탄 아이바크에게 일인 주도권이 돌아간 1254년 아이바크는 바이바르스 소속이며 맘루크군의 군단장 아크다이를 살해했다.
[[1261년]] 훌라구에게 살해된 압바스 왕조 최후의 [[칼리파]] [[알무스타심]]의 숙부를 카이로에서 보호했다. 이 돌연한 행동은 카이로 주민에게 갑작스런 지배자가 되었던 바이바르스에게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구심력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쿠투즈를 살해하고 즉위한것 때문에 상당히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다만 바이바르스는 실권을 돌려주고 [[칼리파]]에게 의존하지 않았기에 [[칼리파]]는 명목상의 존재였다. (여담이지만 바이바르스는 열심한 이슬람교 수니파였다고 한다). 이후 바이바르스는 각지로 출병하였는데, 1277년 죽을때까지 30회 이상의 출병을 벌였다고 한다.
 
[[1268년]] 훌라구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노려 북상하여 몽골에게 협력했던 십자군 국가의 여러도시를 공략하여 완전히 파괴했다. [[5월 18일14일]] [[안티오키아]]를 포위해 약 4일만에 함락시켜 [[안티오키아 공국]]을 멸망시켰다. 그 때 주민들 모두를 살해하고, 일부는 노예로 만들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이것은 [[기독교]] 국가들을 자극시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십자군 파병을 불러일으켰다. [[1271년]] 십자군이 침공해오자 그들과 싸우고 후에 에드워드 1세와 휴전을 맺었다. 일부 문헌에 따르면, 바이바르스는 에드워드 1세를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고 전해진다. 결국 에드워드는 아버지 [[잉글랜드의 헨리 3세|헨리 3세]]의 죽음으로 인해 철수했다.
 
그의 치세 동안 안티오키아뿐만 아니라, [[알레포]], 하이파, 아르스프 등 십자군 여러 도시를 함락시켰다. 몽골에 대해선 적대하던 [[일 한국]]에 대항하기 위해 [[킵차크 한국]]과 동맹을 맺고, [[비잔티움 제국]], [[시칠리아]]와도 통상관계를 열었다. 또 카이로에서 다마스쿠스에 이르는 역전제을 확립하였다. 이 역전은 카이로에서 다마스쿠스를 편도 4일 공정으로 통신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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