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앙투안 레옹 드 생쥐스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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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에는 23세의 나이에 국민위병대 대장이 되었고, 그해 [[7월 14일]] 연맹 축제에 참가한다. [[1791년]]에는 ‘혁명과 프랑스 헌법의 정신’을 발행하여 혁명 중 최연소 이론가 된다.
그는 생애에서 수많은 명연설을 남겼고, 가장 유명한 것은 [[1792년]]에 [[8월 10일 사건]] 후 진행된 국왕 재판에서 “처녀 연설”로 생 쥐스트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국민 공회]] 의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군 간부들과 병사들의 격차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는데 이 때문에 장군들 및 고급 장교들에게는 공포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지만 일반 사병이나 하급 간부들에게는 성자처럼 여겨졌다. 그는 하급 군간부와 병사들을 직접 위문하며 "진정한 행복은 불행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 무렵 그는 일반 병사들에게는 낭만적인 이미지를 쌓게 되었다.
그는 1792년 [[11월 13일]] 연설을 통해 통렬하고 냉철한 의견을 제시하여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여론을 결정지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주목을 받았고, 곧 몽테뉴파(산악파)의 저명한 인물이 된다. 로베스피에르와의 우정은 자코뱅 파에도 잘 알려졌는데, 그들은 그를 가리켜 ‘민중의 메시아인 성 요한’(''saint Jean du Messie du peuple'')이라고 불렀다.
===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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