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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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 활동 ===
이효석은 경성 제1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 (이효석 단편소설)|행진곡(行進曲)]]》, 《[[기우 (이효석 단편소설)|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九人會)에 참여, 《[[돈 (이효석 단편소설)|돈(豚)]]》, 《[[수탉 (이효석 단편소설)|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가난뱅이 작가<ref name="sumyonje">[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2/25/2004022555285.html 평론가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 출간] 조선일보 2004.02.25</ref>'였다. 그는 돈없이 자신의 가난하고 빈한한 처지를 스스로 '가난뱅이 작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작가였던 이효석은 경성 토호 집안이었던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백방으로 직업을 구했다. 중학 시절 은사가 주선해준 취직 자리는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다.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는 곳이다.<ref name="sumyonje"/> 동료들의 지탄이 빗발쳤다. 결국 이효석은 열흘 만에 [[조선총독부]]를 그만뒀다.<ref name="sumyonje"/>
 
=== 교수 생활과 작품 활동 ===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숭실전문학교]]의 [[국문학]]과 [[영문학]] 교수가 된 후, 강의 활동과 동시에 《[[산 (이효석 단편소설)|산]]》, 《[[들 (이효석 단편소설)|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아름답게 묘사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효석의 삶은 시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양 영화를 즐겨 보았고, 서양에서 온 가수나 무용단의 공연을 보며 넋을 잃기도 했던 도시인의 삶이 그의 삶이었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화분 (이효석 단편소설)|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화분 (이효석 단편소설)|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 최후 ===
[[1940년]] 부인 이경원과 차녀를 잃은 후 실의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못하다가, [[1942년]] [[뇌척수막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 사후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모친의 유골과 합장했으나, [[1972년]] [[영동고속도로]] 건설공사로 인해 용평면의 고속도로 변으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1998년]] 영동고속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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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
[[분류:사상가]]
[[분류:자유주의자]]
[[분류:강원도 출신]]
[[분류:병사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