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다 노리히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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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요미우리 감독으로 취임한 오 사다하루로부터 ‘한발타법’({{lang|ja|一本足打法}})을 추천받아 수도권에서 경기가 있는 어떤 날에는 매일 같이 오 사다하루의 스승인 [[아라카와 히로시]]의 자택에 드나들며 한발타법의 습득을 시도했지만 뚜렷한 결과를 남길 수 없었다. 그 후 1985년부터 요미우리의 타격 코치로 부임한 [[마쓰바라 마코토]]의 지도에 의해 자신의 타격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외야수와 1루수로 같이 활동하면서 주전 멤버들의 부상 이탈로 자리를 메우는 등 출전 기회가 늘어났다.
 
1987년 시즌 후반에 [[마쓰모토 다다시]]로부터 외야의 포지션 자리를 차지했고 이듬해 1988년에는 등번호를 '''10'''번으로 변경해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웠다.<ref>1987년 8월 9일 [[나고야 구장]]에서 1군에 첫 등판하여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고졸 신인이자 좌완 투수인 [[곤도 신이치]]가 선발 등판했던 [[주니치 드래곤스드래건스]]전이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 라이온스]]와의 [[1987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1번 타자로 기용되었다.</ref>
 
1989년 시즌 도중 나카하타 기요시의 부상과 거기에 따른 [[오카자키 가오루]]가 3루수로 변경된 것에 의해 1루수의 빈 자리를 차지하면서 주전 1루수로 활약하는 등 그 해에는 처음으로 [[미쓰이 골든 글러브상|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89년 일본 시리즈|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7차전에서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스버펄로스|긴테쓰 버팔로스버펄로스]] 선발 투수였던 [[가토 데쓰로]]로부터 선제 홈런을 날리면서 주루 도중에 3루 베이스 부근에서 “바~카!!!” 라고 외쳤다고 한다. 요미우리는 3차전에서 가토-[[무라타 다쓰미]]-[[요시이 마사토]]의 계투진 앞에서 완봉되었지만 승리투수가 된 가토가 경기 직후 “요미우리는 롯데보다 약하다”라는 취지의 발언한 적도 있어 이 “바~카!!!” 라는 발언은 일반적으로 “가토의 폭언에 대한 매도”라고 인식되었다.<ref>그러나 고마다는 실제로 가토의 발언 자체에 화가 나있던 것은 아니고 장외 홈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그 일타에서 승리를 확신했다는 등에 흥분한 상태에서 “바~카야로~!!!” 라고 외쳤지만 “‘바~카’라는 곳만 강렬하게 입을 크게 열어 말한 것이니까 그것이 텔레비전에 비쳐서”, “가토 본인도 아마 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들렸었던 것은 [[가네무라 요시아키]] 정도였다”라고 후에 이렇게 말했다.</ref> 팀은 3연패를 당하다가 이후 4연승을 기록하면서 자신도 MVP로 선정되었다.
 
1990년에는 시즌 22홈런과 83타점을 팀내에서 최다 기록을 세웠고, 이듬해 1991년에는 개인 최고 성적인 3할 1푼 4리의 타율을 남기는 등 부동의 주축 타자로서 맹활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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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아킬레스건]] 통증에 시달린 [[하라 다쓰노리]]가 1루로 변경된 것에 의해 [[우익수]]로 전향했는데 수비 범위는 좁았지만 강한 어깨로 팀 승리에 기여했다. 전반기에는 홈런을 양산했지만, 타점 부문에서도 거의 동률을 이룰 정도로 계속 기록하는 등 그 해에는 개인 최다인 27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전반기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하라를 대신해 4번 타자로서 29경기에 출전했다. 시즌 종료 후 하라, [[사이토 마사키]]와 함께 일본인으로서는 연봉 1억 엔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이듬해 1993년에는 하라가 3루수로 다시 변경되면서 고마다도 다시 1루수로 복귀했지만 갑작스런 타격 부진으로 인해 1990년부터 계속된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중단되었다. 그 해에는 나카하타 기요시 타격 코치와의 의견 대립으로 갈등이 생기는 등 일부 스포츠 신문에서 관련 기사가 가끔 다뤄지기도 했다. 1993년 시즌 종료 후 [[주니치 드래곤스드래건스]]의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FA 자격을 얻으면서 요미우리에 입단하는 것이 확실시 되자 출전 기회를 빼앗기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고마다는 오치아이와 동일하게 FA 선언을 했다. [[간토 지방]]의 연고지를 두고 있는 구단을 희망하는 고마다와 [[곤도 아키히토]] 감독의 영입 희망이 일치하는 형태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 이적했다. 요코하마 구단은 고마다의 영입을 앞두고 1980년대의 요코하마를 대표하는 간판 선수였던 6명의 선수들([[다카기 유타카]], [[야시키 가나메]], [[다이몬 가즈히코]], [[야마자키 겐이치]], [[이치카와 가즈마사]], [[마쓰모토 유타카]])을 무더기로 방출시켜 방출한 선수의 전체 연봉과 고마다의 획득에 필요한 자금이 거의 일치한 것으로부터 일부 언론에서는 ‘고마다의 획득 자금 돈벌이’라는 야유와 비판이 쏟아졌다. 요미우리로부터 FA를 선언하여 일본 국내 구단에 이적한 것은 고마다 외에도 [[고쿠보 히로키]], [[오무라 사부로|사부로]], [[쓰루오카 가즈나리]]가 있지만 요미우리의 토박이 선수로서 일본 국내 구단에 이적한 사례는 고마다가 유일하다.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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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997년에는 주로 5번 타자로서 출전하여 5년 만에 3할 대의 타율을 달성함과 동시에 시즌 86타점을 기록하여 요코하마 이적 후 최고의 성적을 남겼다. 1998년에는 팀의 주장으로 발탁되었고, 일명 ‘[[머신건 타선]]’의 한 명으로서 팀의 리그 우승 달성에 기여했는데 시즌 전반기에서는 [[로버트 로즈]]를 대신하여 4번 타자를 맡는 등의 맹활약을 보였지만 후반기에 들어서는 심각한 타격 부진에 시달렸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 라이온스]]와 맞대결하는 [[1998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5차전에서 4안타 5타점의 대활약과 6차전에서는 상대 투수 [[니시구치 후미야]]로부터 결승 2타점 적시타를 때려내는 등의 활약으로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9년 시즌 타율 2할 9푼 1리를 남겼지만 로즈를 시작으로 하는 타격진이 모두 절호조였기 때문에 팀 타율(.294)을 밑도는 성적을 남겼다. 5월 18일부터 6월 17일까지 25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고 7월 17일의 [[주니치 드래곤스드래건스]]전에서 1993년부터 계속된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739경기로 멈췄다.
 
이듬해 2000년, 개인 통산 2000안타가 걸려 있는 시즌이었지만 그 후에는 타격 감각이 떨어질 정도의 부진을 겪으면서 결국 2군으로 강등되었다. 자신의 가족들이 구장에서 관전하고 있던 ‘[[아버지날]]’인 6월 18일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곤도 히로시]] 감독의 지시로 대타를 내보낸 것에 대해 격분하면서 배트와 헬멧을 내던지고 경기 도중에 무단으로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했다.<ref>이 일의 배경에는 우완 투수와 상대하면서 우타자의 대타를 내보내는 것과 당시 팀은 최하위였던 것에도 관계없이 번트나 미팅을 하지 않는 등 점수를 얻기 위한 궁리를 하지 않는 [[곤도 히로시]] 감독의 용병술에 노골적인 불만도 있었다고 한다.</ref> 구단으로부터 직장 방기의 징벌 조치로 30만 엔의 벌금과 2군으로 강등되는 명령을 받았다. 이 때 2000안타를 단념해서라도 은퇴를 할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소동을 전해 들은 오 사다하루로부터 자필 편지를 받아 당시의 행동에 대한 잘못을 뉘우쳤고, 9월 6일에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ref>통산 2000안타를 달성할 당시에 “나 같은 보통 선수라도 끈기있게 열심히 노력하면 위업을 달성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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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산 1000삼진 : 1999년 5월 27일, 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야쿠르트 스왈로스]] 9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역대 24번째.
* 통산 2000경기 출장 : 2000년 4월 30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6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역대 31번째.
* 통산 2000안타 : 2000년 9월 6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드래건스]] 22차전([[나고야 돔]]) ※역대 29번째.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