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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역 시절 ===
==== 1930년대 ~ 1940년대 ====
구마모토 현립 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철도원의 길을 권하는 아버지를 설득하고, 1938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도쿄 교진군]]에 투수로서 입단, 도쿄 교진군 외에도 [[한신 타이거스|한신]], [[오릭스 버팔로스버펄로스|한큐]], 그 해에 창단한 신생 구단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난카이]]와의 쟁탈전을 벌인 끝에 영입되었다. 계약금은 300엔, 월급 110엔이었는데 300엔이라고 하는 금액은 “도쿄에서는 모르지만, 구마모토의 시골이라면 어떻게든 집 한 채 지어진다” 라고 말했다. 입단 동기이자 구마모토 공업학교의 동급생인 요시하라 마사키를 시작으로 [[지바 시게루 (야구인)|지바 시게루]], [[우쓰미 이소오]], [[노무라 다카요시]], [[이와모토 아키라]], [[산타 마사오]] 등 이들을 통틀어 ‘꽃의 쇼와 13년조’({{lang|ja|花の昭和13年組}})의 일원으로서 주목을 받았다. 도쿄 교진군의 목적은 간판 타자이자 포수인 요시하라이며, 투수인 가와카미가 그 다음이었다고 한다. 가와카미는 도쿄 교진군과 계약한 1주일 후에 난카이와의 계약금 500엔, 월급 150엔이라고 하는 좋은 조건을 들어 도쿄 교진군과 계약을 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고 한다. 또, 이설로서는 [[야마토 규시]]의 《프로 야구 삼국지 제4권》(베이스볼 매거진사)에 의하면 난카이의 입단이 정해지고 있었지만 도쿄 교진군은 난카이의 가입에 기존 구단의 반대가 강했던 상황을 이용했다. 도쿄 교진군의 [[스즈키 소타로]]는 난카이의 [[다카스 가즈오]] 감독을 불러 난카이의 가입에 반대하지 않는 대신에 가와카미와 요시하라의 영입으로부터 손을 떼게 하는 거래를 했다고 한다.
 
[[파일:Asahi19370820.jpg|thumb|left|200px|구마모토 공업학교 재학 당시 가와카미를 소개하는 [[아사히 신문]]의 당시 보도 내용들]]
가와카미는 고향인 [[히토요시 시]]로 돌아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농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프로 야구는 곧 1946년 4월부터 페넌트레이스가 재개되어 도쿄 교진군은 가와카미에 대해 선수 복귀를 주장했다. 그러나 가와카미는 히토요시 시에 있는 가족을 부양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만약 3만엔 받을 수 있다면 도쿄 교진군에 복귀할 뜻이 있다”라고 전했다. 이것은 프로 야구에서는 처음으로 선수가 구단에 대해 계약금을 요구하게 되어 ‘3만엔 홀드 아웃 사건’ 이라고 일컬어진다. 1946년 6월부터 도쿄 교진군에 복귀하여 그 해에 연 3할 대의 타율을 기록했다.
 
1946년 8월 26일의 [[주니치 드래곤스드래건스|주부니혼군]]과의 경기에서 긴자의 운동도구 전문점으로부터 선물 받은 빨간 배트를 사용하여 플레이를 했는데 이 ‘'''빨간 배트'''’는 가와카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면서 ‘파란 배트’를 사용한 [[오시타 히로시]]와 함께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이 운동도구 전문점과의 계약은 프로 야구 선수의 CM출연 제1호라고도 한다. 빨간 배트와 파란 배트는 그 해까지 사용은 금지되었지만 팬들에게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47년에는 팀 이름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바뀌었고 시즌 도중부터 요미우리의 감독은 [[미하라 오사무]]가 부임했다. 미하라는 스타를 중용해 가와카미도 미하라를 그리워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젊은 선수들이나 타 구단으로부터 이적한 선수들로서는 스스로 취급한 것에 대한 불만을 느끼면서 1949년 시즌 종료 후 일부 ‘반(反) 미하라’성향을 가진 선수들이 궐기해서 감독인 미하라를 배척해 [[미즈하라 시게루]]를 옹립하려고 한 ‘미하라 감독 배척 소동’이 일어났다. 가와카미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지만 구단 측은 선수들의 압력에 굴복해 미하라 감독을 경질하고 미즈하라를 차기 감독으로 임명했다. 가와카미는 미즈하라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고 미즈하라는 팀의 주력 선수가 되어 있던 가와카미를 질책 하는 등의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1951년에 시즌 타율 3할 7푼 7리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1986년에 [[랜디 바스]](한신)가 3할 8푼 9리를 기록하면서 기록 경신할 때까지 센트럴 리그의 기록으로 유지되었고 1989년에 [[워렌 크로마티]]가 경신(.378)할 때까지의 구단 기록이었다. 같은 해 시즌에서는 규정 타석 도달자에 의한 연간 삼진은 6개(424타석)를 기록하면서 최소 삼진 타이 기록도 달성했다.
 
1956년 5월 31일의 [[주니치 드래곤스드래건스|주니치]]전에서는 상대 투수 [[나카야마 도시타케]]로부터 일본 프로 야구 최초의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는데 이 도달한 경기 수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의 최고 속도 기록(1646경기)이자 1500안타의 도달한 경기 수는 1241경기이다. [[알렉스 라미레스]]의 1236경기, [[레론 리]]의 1237경기에 뒤를 이은 빠른 기록이며, 일본인으로서는 최고 속도 기록이다(미일 통산 기록에서는 모두 [[스즈키 이치로|이치로]]가 기록을 깼다). 1957년에는 1949년 이후 타율이 3할 대의 미만으로 끝나(8년 연속 타율 3할은 [[오 사다하루]]와 대등한 역대 2위 타이 기록), 다음해인 1958년은 “그 해에 타율 3할을 기록할 수 없으면 은퇴하겠다”라고 결심했지만 극심한 타격 부진에 시달리면서 4번 타자의 자리도 신인 선수인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빼앗겨 시즌 후반부터는 6번으로 강등되었다. [[1958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니시테쓰 라이온스]]에게 3승 4패로 패하면서 7차전 종료 직후에 현역 은퇴를 공식 표명했다. 현역 시절 말기에는 허리가 돌지 않게 되어 ‘'''텍사스의 데쓰'''’({{lang|ja|テキサスの哲}})라고도 불리고 있었다.
 
은퇴 후 1959년부터 친정팀의 코치로 부임했고, 1960년의 10월에는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방송국 카메라맨을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키면서 구단으로부터 근신 처분을 받았고 가와카미는 대리 감독을 맡았다.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요미우리 구단의 전무로 취임했지만 현장으로부터 멀리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구단주 [[쇼리키 도루]]의 의향으로 소년 야구 담당이라는 직책이 바뀌었지만 1년 만에 그만두었다. 1976년부터 [[일본방송협회|NHK]]의 야구 해설위원, [[닛칸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 발탁 되었다.
 
가와카미의 뒤를 이은 나가시마 감독은 1975년 시즌에 구단 역사상 최초로 최하위권에 머물렀고(6위, 47승 7무 76패) 같은 해 오프에는 트레이드로 입단한 [[장훈|하리모토 이사오]], [[가토 하지메]]를 영입하는 등 전력을 보강하면서 1976년, 1977년에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오릭스 버팔로스버펄로스|한큐 브레이브스]]한테 잇달아 패해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은 실패했다. 팀도 여전히 V9을 이끌었던 베테랑 선수들이 주축이었지만 V9과 비교하면 팀 전력에서의 저하가 분명해졌다. 전 감독 가와카미도 “이기는 것에 너무 집착하면서 차세대의 전력을 정비해 오지 않았다”라고 비판했다.
 
1980년의 요미우리는 페넌트레이스 초반부터 우승권에서 멀어져 구단 역사상 최초인 ‘3년 연속 우승 달성 실패’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8월에는 [[주간 문춘]]의 [[아오타 노보루]], [[마키노 시게루]], [[구니마쓰 아키라]], [[후지타 모토시]] 등과 함께 요미우리 현재의 모습을 OB의 입장으로부터 질책한다고 하는 취지의 좌담회에서 “차기 감독은 후지타가 될 수 있다” 라는 등의 발언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같은 해 시즌 성적은 3위가 되면서 1980년 10월 21일 요미우리는 나가시마의 감독직 사임을 주장하면서 차기 감독은 후지타 모토시가 취임을 한다고 발표했지만, 당일 [[스포츠 닛폰]]이 ‘나가시마 해임’이라는 제하의 내용을 보도해 요미우리 팬들은 구단에 의한 해임이라고 받아 들여 주간 문춘의 발언으로부터 ‘가와카미가 나가시마 해임의 흑막이다’라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가와카미 본인은 1980년 말에 ‘선데이 마이니치’와의 인터뷰에서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흑막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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