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분류 정리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에서 수 많은 [[민주주의|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던 [[1979년]] [[10월 26일]] ~ [[1980년]] [[5월 17일]] 사이를 일컫는 말이다. 이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 (운동)|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것이다. 서울의 봄은 [[신군부]]가 투입한 계엄군에 의해 [[5·18 광주항쟁]]이 606명의229명의 사망자·실종자와 3천여명의 부상자를 남긴채 무력진압되면서 종결됐다.
 
== 개요 ==
1979년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단행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 중에 [[제4공화국]]의 두 번째 내각인 [[최규하 정부]]가 출범했다.
 
1979년 12월 6일 최규하 내각은 긴급조치를 해제하여 개헌 논의를 가능토록할 수 있도록 하고, 긴급조치에 의해 처벌받은 재야 인사들을 복권했다. 국민들 사이에서도 유신 체제가 끝나고 민주화를 이룩할 것이라는 기대가 일었다. [[윤보선]] 등 시민사회 원로는 대통령 [[최규하]]에게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 선거를 요구했다. 1980년 5월 여야는 같은 달 20일 국회를 열어,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 논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5월 1일부터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 일정 제시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청하는 대규모 대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월 초부터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비상계엄 전국확대' , '국회 해산' , '비상기구 설치'등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했다.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5월 20일 예정된 임시국회를 무산하고 [[국보위]]를 설치해 군부 주도로 정국을 이끌어나갔다. 군부는 5월 17일 단행된 조치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했고, 이로써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