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대분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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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이 문서는 '''[[기독교]]의 동서 분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4세기 [[로마 제국]]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자유를 얻은 이래 11세기까지 교회는 로마, 콘스타니노플,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의 5개 교회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성립,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과의 연계 등으로 약화된 4개 교회가 분열하게 되었다.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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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무함마드]]의 추종자들, 즉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곳 북아프리카 출신이다)와 동[[지중해]]를 [[기독교]]의 영역에서 빼앗아갔다. 그리고 [[북유럽]]에서는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 벌어져 [[교황|로마 교황]]의 권위를 세워나갔으며, [[로마 교황청]]은 유서 깊고 세련되며 반동방적(半東方的)인 [[동로마 제국]]과 북방의 새로운 세력([[게르만족]],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로마의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왕]] 및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만 했고, 그들의 결단은 이후 [[중세]] 유럽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이 사건들은 일종의 병목 현상을 일으키면서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726년]]의 [[비잔티움
== 당시 주변 상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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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보니파키우스의 업적은 두 방향에서 이후 서방 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첫째는 그의 전도 사업으로 대부분의 [[게르만족]]이 최초로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둘째로 갈리아 지방에서 그의 활약으로 프랑크 국왕과 [[교황|로마 교황]] 간의 관계가 전례없이 밀접해지게 되었다.
===
동서 로마가 분리되었지만, 제국의 중심은 [[
7세기 들어
동지중해에서 옛 대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던
=== 이슬람과 프랑크 왕국 ===
이 두 세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630년]], 메카 시(市)의 정복을 시작으로 전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동지중해를 장악하고 [[
== 726년,
수도원 운동으로 서로마 교회는 수많은 이교도 야만족들을 개종하였으며, 그 중에 한 부족인 [[프랑크족]]은 통치상의 필요로 로마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라틴화 된 [[갈리아]]를 지배하는 데에 라틴 문명인 서로마 교회의 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크족은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부터 서로마 교회를 지켜주었다. 로마 교황이
8세기 초 이슬람의 침략을 물리친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
다른 문제는 소토지 보유 자유농의 몰락과 대토지 겸병의 증대였다. 소규모 자영농은 제국군의 주력을 이루었으므로 제국 정부로서는 그들의 몰락을 방치할 수 없었다.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에게 넘어갈 지도 몰랐다. 대토지 소유자들 중에서도
이런저런 이유와 목적으로 [[726년]]에 첫 [[성상파괴운동|성상파괴령]]이 내려졌다.<ref>그 후, 몇 차례 번복 과정을 거치면서 [[843년]]에 성상파괴령은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오늘날 [[
이러한 도전에 격분한
== 프랑크 왕국과 피핀 및 동서 교회의 분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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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사건에 영향을 미친 마지막 요인은 [[롬바르드족]]이었다. [[기독교]]를 신봉하였기에 교황에게 우호적이던 롬바르드족이었으나, 아이스툴프 왕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전체를 제패하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는 로마 교회를 새로운 이탈리아의 중심 교구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성 베드로]]의 유지를 이어받아 전 서방 세계의 기독교를 다스린다는 체면이 있던 로마 교황은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롬바르드 왕국의 최고 성직자에 불과한 존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청할 생각도 더더욱 없었다. 결국 새로운 보호자를 찾아야 했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피핀이었다.
[[751년]], 왕이 되고자 했던 [[피핀 3세]]는 보호를 약속하는 대신,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한 재가를 로마 교황에게 요구했고, [[교황 자카리아]]는 즉시 보호를 댓가로 그를 새로운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인정하였다. 피핀은 [[752년]]에 로마를 위협하던 아이스툴프를 완전히 패배시키고, 중부 이탈리아와 라벤나를 차지했다.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이로써 서로마 교회는 프랑크 왕국과 밀접하게 결합되었으며,
{{기독교의 교파 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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