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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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촉이 건국되기 이전 촉지역은 [[전촉]]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내부의 부패가 심해 [[925년]] [[후당]]의 장종(莊宗; [[이존욱]])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러고 나서 이 땅의 통치을 위임받은 이가 후촉의 시조인 [[맹지상]]이었다.
 
그후그 후 후당에서는 장종이 살해당하고 명종(明宗, [[이사원]])이 옹립되었다. 명종은 촉에 있던 맹지상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그를 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반발한 맹지상은 [[930년]] 거병하여 후당군을 촉에서 몰아내고, [[932년]]까지 촉의 전역을 장악했다. 이쯤되자 명종도 맹지상을 완전히 지배하에 두는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회유책으로 전환하여 [[933년]] 맹지상을 촉왕에 봉하였다. 다음해 명종이 죽자 맹지상도 완전히 자립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나 같은 해 사망했다.
 
그후그 후 맹지상의 3남 [[맹창]](孟昶)이 제위를 이었다. 천연의 요해에 있던 촉은 외부의 적을 걱정하지 않아서 좋았고, 군대를 내부의 감시로 돌려 권력을 유지했다. 전촉이 발전시켰던 농업, 양잠업을 계속해서 발전 유지시키며, 문인의 보호에 힘을 기울였다. 맹창은 수도 성도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몰두하여 성내(중국의 도시는 대체적으로 성채도시였다) 여러 곳에 [[부용]]화(芙蓉花)를 심어 성도성는 별명이 부용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오대(五代)가 [[후진 (오대)|후진]]에서 [[후한 (오대)|후한]]으로 대체되는 혼란을 틈타 진(秦),계(階), 성(成), 봉(鳳)의 4주(현재의 [[감숙성]] 천수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빼앗았다. 그러나 후한에서 [[후주 (오대)|후주]]로 교체되고, 명군 세종(世宗, [[시영]])이 등장하자 [[955년]] 사천을 빼앗겨 버렸다. [[960년]] [[송나라]]가 건국되자 맹창은 북쪽의 [[북한 (십국)|북한]]과 손을 잡고 송나라에 대항했으나, 저항은 수포로 돌아가 [[965년]] 송나라에 병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