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도 대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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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의 병력에 대해선 [[삼국지]]의 저자 [[진수 (서진)|진수]](陳寿)가 쓴 본문부분에는 원소군 10여만, 조조군 1만에 불과하다고 적었으나, 이것에 대해 [[배송지]](裴松之)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로써는
# 조조가 세력을 일으켰을 때 5천의 병사를 갖고 있었고, 그후그 후 황건적의 잔당 30만을 항복시키고, 기타 수많은 세력을 병합하였다. 그런데도 겨우 1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적다고 생각된다.
# 원소는 수십 리에 걸쳐 둔영을 연결하며 군대를 진군시켰는데, 조조가 원소군의 1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전력으로 이에 똑같이 대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원소군이 조조군의 10배였다면 이치상 포위하고 출입을 단절해야 하나, 조조가 별군을 나눠 원소군을 공격할때도 이것이 저지된 일이 없었던 것은 원소의 군사수가 조조를 완전히 압도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 원소군이 붕괴한 후 원소군의 병사 8만을 붙잡았다고 하는데, 고작 1만에 불과한 병사로 8만 명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진수가 왜 책에 그렇게 기술했냐는 것에 대해선 조조의 군략을 돋보이기 위해 과장해서 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지] 위서 [[국연]](国淵)전에서는 도적의 무리를 격파한 상황에서 이것을 보고할 때 상주문에는 1을 10으로 과장해서 기재하는 것이 그 시대 통례라고 일지에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연의에서는 조조군 8만, 원소군 80만이라고 기술한것도 있다. 덧붙여서 이 전투 후에도 세력적으로는 여전히 원소가 우세했다. 원씨 가문의 멸망을 결정짓게 만든것은 그후그 후 일어난 원소의 급사와 어린 후계자 원상의 집권으로 인한 내부분열 때문이었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