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량 (151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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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량'''(李樑, [[1519년]] [[11월 17일]] ~ [[1563년]] [[3월 8일]])은 [[조선]] 중기의 왕족이자 문신, 외척이었다. 왕족으로는 [[조선]] [[조선 태종|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5대손이었고, 외척으로는 [[조선 명종|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와 [[심의겸]] 남매가 그의 외조카였다. 현령으로 [[전성군 (1488년)|전성군]]에 추봉된 [[전성군 (1488년)|이대]](李對)의 아들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며 자는 공거(公擧)이다. [[정사룡]](鄭士龍)의 문인.
 
왕족으로 [[1546년]](명종 2)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그뒤그 뒤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올라 [[현신교위]]를 지냈다. [[1552년]](명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인순왕후]]의 외삼촌이라는 배경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1563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해 [[이조]][[전랑]]에 추천된 자신의 아들 [[이정빈]](李定賓)이 상피제로 갈리면서 후임으로 부임한 이정빈의 친구 [[유영길]]의 임명을 반대하던 [[박소립]], [[허엽]], [[윤근수]], [[윤두수]], [[기대승]] 등을 탄핵하려다가, 그해 [[10월]] 이를 막으려는 외조카 [[심의겸]]의 사주를 받은 [[홍문관]][[부제학]] [[기대항]]의 탄핵을 받고 유배, 배소에서 죽었다.
 
사후 손자 [[이충]](李沖), [[이명]](李溟)의 현달로 [[증직|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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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전성군 (1488년)|이대]]는 [[용강]][[현령]]에 이르렀지만 이량과 그의 형제들의 거듭된 출세로 [[증직]]으로 [[호조]][[참판]]과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여러번 거듭 [[추증]]되어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여동생 중 한명은 [[심강]]에게 시집갔는데, [[인순왕후]]와 [[심의겸]], [[심충겸]] 남매의 어머니가 된다.
 
어려서 [[정사룡]](鄭士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2)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그해의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다. 그뒤그 뒤 [[음서 제도|음보]]로 출사하여 [[현신교위]](顯信校尉)을 지냈다.
 
[[1551년]]에는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해 [[2월]]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불교]][[양종]]을 혁파할 것을 여러번 주청했다가 거절당하자 [[2월 11일]] [[성균관]] 강학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조선 명종|명종]]은 이들을 타일렀고, 임백령(辛百齡)·이언이(李彦怡)·박율(朴栗)·강극성(姜克誠)·심순(沈荀)·정붕열(丁朋說) 등 6인과 함께 이틀만인 [[2월 13일]]에 다시 [[성균관]]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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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 과거 급제와 관료생활 초반 ====
[[현신교위]]로 재직 중<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552_003311&isEQ=true&kristalSearchArea=B 이량: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ref> 과거에 응시하였다. [[1552년]](명종 7) 스승인 [[정사룡]]이 고시관이 되어<ref name="gossi01">[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552_003311&isEQ=true&kristalSearchArea=B 이량: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2]</ref> [[과거 시험]]을 주관하게 되자, 그의 후원으로 식년문과에 응시하여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ref name="ee01">[http://www.rfo.co.kr/pachong/view.php3?mode=view&inmul_code=&page=&type=serache&sermun=공거&qu=content&mode1=&idcount=302&page=1&qu1=name 이량]</ref>하였다. 이때 그의 스승인 [[정사룡]]이 미리 시험 주제인 전(箋)의 제목을 양에게 알려주어 그로 하여금 오랫동안 글을 구상하게 해서 시험에 합격하게 했으므로 물의(物議)가 떠들썩하였다.<ref>명종실록 12권, 명종 6년(1551 신해 / 명 가정(嘉靖) 30년) 10월 13일(정묘) 1번째기사 "근정전에서 정시를 보여 생원 이양이 수석을 차지했으나 물의가 생기다"</ref> 그뒤그 뒤 주서(注書)가 되었다.<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3189a</ref>
 
한편 그의 자부 심강(沈鋼)은 아버지 [[심연원]](沈連源)에게 그를 홍문록(弘文錄)에 들도록 하자고 추천하자 심연원이 “너의 처남 이양이 만약 청반에 들게 되면 많은 당류(黨類)를 심어 나라를 그르치지 않겠느냐?”며 반대하였다.<ref>명종실록 25권, 명종 14년(1559 기미 / 명 가정(嘉靖) 38년) 1월 9일(신사) 3번째기사</ref> 그러나 스승 [[정사룡]] 등의 추천으로 결국 홍문록에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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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요직 역임, 고속 승진 ====
이후 [[예조]][[정랑]]을 거쳐 58년 [[5월]] [[병조]][[정랑]]이 되고 명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그해 [[6월]] [[사간원]]헌납(獻納)이 되었다. [[1558년]] [[7월]] 왜국 사신의 행동을 제대로 감찰하지 못했다 하여 대사간 윤인서(尹仁恕), 사간 이지신(李之信) 등 [[사간원]] 관원이 동시 사퇴할 때 함께 대기하였으나 [[명종]]의 특별배려로 그해 [[7월 15일]] 수찬(修撰), [[7월 27일]]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이후 [[홍문관]] 수찬(修撰), 교리(校理), [[10월]] [[사헌부]] 지평(持平) 등의 삼사와 언관직을 주로 역임하였다. 그뒤그 뒤 그가 [[명종]]의 총애를 받게 되자 대소 문무관 중에 그의 심복을 자처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환관 [[정번]](丁蕃)은 그에게 정보를 주고받으며 그의 심복이 되었다. 그뒤그 뒤 한때 그의 세력에 빌붙던 김규와는 [[1557년]] 한 기생을 놓고 다투기도 한다. [[1558년]]초 [[홍문관]] 교리, [[사헌부]][[지평]], 그해 12월 다시 [[병조]][[정랑]]이 되었다. 한편 [[윤원형]] 세력을 견제하려던 [[심통원]]이 그와 결탁, [[심통원]]일파와 함께 박소립(朴素立) 등을 공격, 배척하였다.
 
[[1559년]] [[1월 9일]]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가 1월 22일 다시 병조정랑이 되었다. 그러나 59년 2월 [[홍문관]]으로 다시 옮겨 [[2월 6일]] 부응교(副應敎)가 되고 독서당 학사(讀書堂學士)로 시사(試射)에 선발되었다가 그해 [[3월 8일]] 다시 [[홍문관]] 응교, [[5월 15일]] [[홍문관]] [[전한]]을 지냈다. 이후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배경으로 하여 세력을 확대시킨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명종의 의지로 [[6월 23일]] 승지로 발탁되었다. 이후 [[6월 23일]] 다시 [[승정원]]동부승지로 발탁된 뒤, 부제학 등으로 요직에 임명되었으며, 바로 초고속 승진하여 바로 당상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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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그뒤그 뒤 우승지로 발탁되었으며, [[1559년]] [[10월 2일]] 우승지로 [[명종]]의 명을 받아 내관(內官) 최한형(崔漢亨)과 함께 [[평양부]](平壤府)에 가서 [[태조]]의 어용(御容, 어진)을 봉심(奉審)하고 돌아왔다.
 
{{인용문2|우리 태조께서 천운에 부응하여 나라를 여셨다. 어용을 개성부(開城府)·경주(慶州)·전주(全州)·평양·함흥(咸興)에 봉안(奉安)하였는데, 개성부에는 해마다 봉심했으나 다른 곳은 한번도 봉심하지 않았으니 선조를 받드는 뜻에 어그러져 매우 미안하다. 가서 봉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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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김홍도와 김계휘가 갑자기 이양과 사귀어 겉으로는 친한 척하였지만 속으로는 실상 그의 어리석음을 이용하여 속인 것인데도 그는 이를 모르고 명사들과 사귄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뒤그 뒤 이양이 대제학 정사룡(鄭士龍)을 인해 사가독서의 선발에 참여되자 장령 김규가 논박해서 삭제시켰는데 김홍도 등도 그 의논에 참여해서 알고 있었다. 이양은 비로소 그들에게 기만당한 것을 알고 드디어 크게 원망했다. 이에 김홍도 등이 패몰되자 이양은 쾌재를 부르며 시를 지었다.<ref>명종실록 22권, 명종 12년(1557 정사 / 명 가정(嘉靖) 36년) 5월 22일(갑술) 3번째기사 </ref>
 
이양이 박순을 강제로 불러 오려고 세 번이나 연회를 베풀고 불렀으나 박순은 일체 사양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이양은 자못 원망하는 말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박순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으나 박순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ref>명종실록 28권, 명종 17년(1562 임술 / 명 가정(嘉靖) 41년) 2월 6일(경신) 2번째기사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