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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의 학통을 받은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광해군]] 때 여러 관직을 지낸뒤 1623년 인조반정 직전 이시백(李時白)의 권유로 반정 모의에 가담하였으나, 거사 당일에는 가담하지 않고 대전에서 인조를 맞이하는 모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논공행상에서 공신에 녹훈되자, 이후원(李厚源)과 함께 사양하였으나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이 수여되었다.
 
그뒤그 뒤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호조좌랑을 역임하고, 학덕이 높아 명망이 있었으며 학행(學行)으로 김집(金集) 등과 함께 조정에 발탁되어 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이괄과 교분이 있었으며, [[1624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거병하자, 정찬(鄭燦)은 이괄의 난에 대한 고변을 하였다. 평소 이괄 부자와 교분이 두터웠던 그는 [[이괄]]의 무혐의를 극구 변호하다가 승지 [[김자점]](金自點)의 탄핵을 받고 투옥, 사형되었다.
그뒤그 뒤 1661년(현종 2) 훈작과 관직이 복권되고,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추증, 월성군(月城君)에 추봉되었으며 강민(剛愍)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 관련 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