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학 (189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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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
광복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했을때 서대문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또한, [[김구]]에게 자신의 사유지내 별장인 서대문구 [[경교장|죽첨장]]([[경교장]])을 [[김구]]의 사저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뒤그 뒤 [[한독당]]의 재정적 후견인 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이후 [[경교장]]은 김구의 사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부 청사로도 활용되었다.
 
그뒤그 뒤 김승학이 작성한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친일파 명단]]에 포함되는 등 최창학의 부일 협력 행위에 대한 인식은 있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1945년]] 12월 조선광업중앙관위원회에 인계이사로 참여하여 일본인 소유였던 광산의 관리와 인계에 관여했고, [[1949년]] 10월 제2차 전국광업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는 등 광공업계에서 계속 활동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되자 몇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친 뒤 [[경교장]]을 반납받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그의 가세가 기울면서 경교장은 처분되어, 여러 손을 거쳐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의 소유가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특별시|서울]]에 남아있었으나 무사히 살아남아 전쟁 이후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였다.<ref>[[네이버]] 백과사전 등 [[대한민국]]의 일부 자료에는 그가 [[한국 전쟁]] 때 납북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역시 금광으로 부자가 된 [[조선일보]]의 전 사주 [[방응모]]와 혼동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잘못된 기록이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