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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총독부]]가 행정권을 장악하자 경기도 [[수원군]] 군수에 임명되었고, 이후 도 참여관과 지사를 지내며 친일 관료로서 활동했다. [[1917년]] [[함경남도]] 참여관을 시작으로 [[전라남도]] 참여관(1918), [[충청남도]] 지사(1921), [[함경남도]] 지사(1924)를 역임했다. [[1926년]] 퇴관과 동시에 중추원의 칙임참의가 되었다.
 
[[1924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서훈 받는 등 공로를 인정 받았고, [[1934년]]부터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직에 앉았다. 그는 [[1926년]]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이후로는 토지의 개량을 통한 산미 증식을 추진하는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고문으로 근무했고, [[1937년]]에는 중추원에서 조직한 화북장병위문대에 가담하여 [[장직상]] 등과 함께 중국 전선의 일본군 위문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뒤그 뒤 1945년까지 여러차례 참의직을 중임하였다.
 
총독부가 [[1935년]]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일제의 통치에 공을 세운 조선인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항상 대국(大局)을 달관하여 일본과 조선의 융화 공영에 진력한 바가 두터웠으며, 그의 공(功)과 노고는 다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평가가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