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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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숙종 10년(1684년) 갑자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재직 중 37살 늦은 나이에 정시문과(廷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숙종 11년(1685년) 을축 5월 25일 정언(正言), 같은 해 8월 25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같은 해 8월 22일 홍문록(弘文錄) 16명에 뽑히고, 같은 해 11월 16일 도당(都堂)에서 뽑은 홍문록(弘文錄) 15인에 뽑혔다.
 
숙종 12년(1686년) 병인 3월 13일 부수찬(副修撰), 같은 해 7월 9일 수찬(修撰), 7월 25일 헌납(獻納)이 되었으나 다음날 교리(校理)로 바뀌었다. 그뒤그 뒤 11월 24일 헌납(獻納), 12월 10일 이조좌랑(吏曹佐郞), 숙종 13년(1687년) 정묘 12월 26일 수찬(修撰), 숙종 14년(1688년) 무진 2월 6일 검상 (檢詳), 3월 18일 수찬(修撰)이 되었다.
 
5월 15일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8월 2일 응교(應敎)가 되었으나 숙종 15년(1689년) 기사 윤 3월 21일 [[기사환국]](己巳煥局)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선친(김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고 [[4월 9일]] [[남인]]의 집중 공세로 사사(賜死)되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장례를 치른 뒤 형제들과 함께 포천 영평(永平 = 경기도 포천) 백운산(白雲山)으로 들어가 산중에 숨어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