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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金活蘭, <small>일본식 이름: </small>야먀기 카쓰란(天城活蘭), [[1899년]] [[1월 18일]] ~ [[1970년]] [[2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대한민국]] 여성운동가, 계몽운동가, 언론인, 교육인이다. [[이화학당]]의 초등, 중등, 고등부를 거쳐 [[1918년]] [[이화학당]] 대학부([[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활동하다가 여자 YMCA를 독립, [[1923년]]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 [[중앙여성기독교청년회]](YWCA)를 조직하였다.
 
[[1923년]] [[미국]] [[오하이오 주립 웨슬리안 대학교]]에 편입, [[1924년]] 학사 학위를 받고, [[보스턴 대학교]] [[철학과]]에 편입하여 [[1925년]] [[9월]]에는 [[철학]][[석사]]를 받았으며, 귀국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사와 교감, 부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10월]]에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철학]][[석사]]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1920년대~1930년대 초 각종 사회운동과 계몽운동에 힘써왔으나, [[1936년]] 전후로 [[친일파]]로 변절해 전시 체제에 매우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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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기 ===
==== 출생과 유년기 ====
우월 김활란은 [[1899년]] [[1월 18일]] [[인천광역시|인천부]] 동구 창영동(당시 우각동) 배다리 마을에서 사업가 김진연(金鎭淵)과 어머니 [[기독교]] 신자인 박도라(朴萄羅)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연은 본래 [[평안북도]] [[철산군]] 출신 중농(中農)이었다가 개항된 [[제물포]]로 옮겨 창고업자가 되었다.
 
그는 3남 5녀 중 막내였다. 본명은 ‘김기득’(金己得)으로 기해년에 태어났다 하여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ref name="한국 최초"> {{서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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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SBN 978-89-85407-35-9
|쪽=18~20
}}</ref> 아호는 우월(又月)이다. 일찍이 내리교회의 전도 부인 헬렌에게 전도받은 어머니 박도라 여사는 후일 온 가족에게 권유하여 가족 모두를 [[기독교]] 신자가 되게 했다. 그녀는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기독교]] 신앙교육을 받았다.‘활란’이라는 이름은 기독교 신앙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에 따라 7세 때에 [[감리교]]에 입교하면서 ‘헬렌’(Helen)이라는 세례명을 받아 이를 아버지가 [[한자]] 표기로 고쳐서 활란이라 이름하였다.
 
[[File:이화학당 소학부 시절의 김활란.jpg|thumb|right|160px|[[이화학당]] 소학부 시절 (앞줄 맨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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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남북협상]]론과 단독정부 수립 론이 나뉘게 되자 [[이승만]]을 지지하고 단독정부 수립의 지지를 선언하였다.
 
한편 그는 친일 인사로 지목된 바 있다. 2001년 <월간중앙> 8월호에서 공개한 '1948년 김구와 임시정부 계열이 지목한 숙청대상 친일인사들의 명단 초안'이라는 문건을 통해 김활란 초대총장이초대 총장이 민족진영에 의해 숙청대상 중 두 번째로 올랐다.<ref name="banmins">[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4915 이대 학생위 "친일파 김활란 동상 철거하라"] 오마이뉴스 2005.03.25</ref>
 
==== 정치 활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