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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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년]]: 만주족 섭정왕(攝政王) 재풍(載沣)에 의해 모든 직무에서 해임됨. 일시 귀향.
* [[1911년]]: 무창에서 봉기 발생.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 진압군으로서 호북의 육군과 해군의 군권 장악.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됨. 그러나, 북양군을 이끌고 한커우(漢口)점령. 이어서 베이징으로 진격, [[청나라]]의 군권을 장악.
** [[쑨원]](孫文)과 막후 협약. 쑨원의 혁명당은 황제 퇴위와 공화정 체재를체제를 요구. 위안스카이는 새로운 정부의 [[중화민국의 총통|대총통]]으로 선출된다는 조건을 내 놓음. 위안스카이는 혁명당의 이름을 빌어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퇴위시킴.
* [[1913년]]: 중화민국 대총통 취임. [[중국 국민당]] 및 국회 해산.
* [[1914년]]: 임시약법(臨時約法) 폐기. 국무원 해산. 북양군 [[단기서]] 등의 군권 박탈. 임시약법의 폐지로 봉건독재적 대총통 권력을 가지게 됨.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이 발발하자 [[영일 동맹|영·일 동맹]]을 근거로 연합군 측에 가담한 일본은 중국 [[산둥 반도]]의 독일 조차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1915년 1월 만주와 산동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21개조 요구]]조건을 위안스카이 정부에 제시했다. 일본은 1915년 5월 7일 위안스카이 정부에 최후통첩을 발하였으며, 위안스카이 정부는 5월 9일 이를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ref>백범흠《중국:외교관의 눈으로 보다》늘품플러스(2010) 411쪽 ISBN 9788993324150 </ref> (→[[21개조 요구]]·[[일본-중국 관계]])이 21개조에 대한 처리는 중국의 민중이 위안스카이에게서 이탈하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