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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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1년]](인종 9)에는 인종을 설복시켜 새 궁궐에 [[팔성당]](八聖堂)을 신축하여 보살·석가·부동(不動) 등 8개의 상(像)을 그려서 안치시켰다. 이듬해 [[1132년]] 왕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불타버린 채 있던 개경의 궁궐을 영수(營修)함에 있어 묘청과 그 일파들에게 궁터를 보게 하니, 묘청은 서경 천도를 목적으로 개경의 궁터가 서경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역설하여 드디어 공사는 중지되고 왕은 묘청의 인도를 받으며 서경에 내려가 천도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김부식]]·이지저(李之底) 등 사대적(事大的)인 개경의 귀족이 반대하여 중지되었다.
 
그후그 후 [[인종]]은 다시 [[개경]]으로 가서 머물다가 [[1132년]] 왕궁이 수축되자 [[서경]]행을 결심한다. 묘청은 인종을 수행하여 서경까지 갔다. 왕궁을 수축하자 다시 서경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ref name="pare1996255">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55페이지</ref> 이때문에 인종을 태우고 가던 말들이 놀라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 진창에 빠져버렸고, 호종하던 시종들은 왕의 행방을 잃고 찾아다니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그날 밤 눈발이 날려 낙타가 죽고 말과 사람이 다치기도 했다.<ref name="pare1996255"/> 서경 가는 길에 사고가 발생하자 개경파 귀족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133년]] 직[[문하성]] 이중, 시어사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묘청을 비롯한 그 일당들을 멀리할 것을 상소하였지만 인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인종은 오히려 1134년 묘청을 삼중대통지 누각우너사로 삼고 자색의 관복을 하사하였다.<ref name="pare1996255"/> 인종의 신임을 확신한 묘청은 다시금 '칭제건원'을 상소하였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f name="pare1996255"/> 이렇게 되자 조정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으로 분리되어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ref name="pare1996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