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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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이었고 팔이 무척 길어 쭉 뻗으면 무릎까지 닿았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5/진덕왕 |본기 권5 진덕왕]] |인용문= 勝曼姿質豊麗 長七尺 垂手過膝 (승만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ref> 이러한 신체적 특징은 [[부처]]의 모습을 갖춘 보살에 비유되었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647년]] 사촌언니인 [[신라 선덕여왕|선덕여왕]]이 [[비담의 난]]을 토벌하던 도중에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다. [[당 태종]](재위: [[626년]] ~ [[649년]])이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선덕여왕]]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고, 아울러
그러나 [[백제]]가 [[신라]]의 내정이 내분으로 불안해진 틈을 타 그해 음력 10월 [[신라]]를 침공하였다. 이에 [[김승만|진덕여왕]]은 [[김유신]]을 출전시켜 [[백제]]군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5/진덕왕 |본기 권5 진덕왕]] |인용문= 元年 ...冬十月 百濟兵圍茂山·甘勿·桐岑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以拒之 苦戰氣竭 庾信麾下丕寧子及其子擧眞 入敵陣急格死之 衆皆奮擊 斬首三千餘級 (원년([[647년]])...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의 세 성을 에워쌌으므로, 왕이 유신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고전(苦戰)하여 기운이 다빠졌는데, 유신의 부하 비령자(丕寧子)와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급히 공격하다가 죽으니, 무리들이 모두 분발하여 쳐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ref> 이렇듯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신라]]는 설상가상으로 [[고구려]]까지 [[신라]] 공격에 가세하자 진퇴양난의 신세가 되었다.
[[648년]]에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을 위해서는 [[신라]]의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환영하였다.(→[[김춘추]]) 진덕여왕과 [[당 태종]]은 서로 간에 친교를 돈독히 한 다음, 나당 연합을 체결하였다. [[김승만|진덕여왕]] 대에 백제가 신라의 턱밑인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까지 공격하여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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