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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계책은 당나라의 [[장손무기]](長孫無忌)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뒤 당군과 같이 전장에 있었는데, 자신의 행동과 처지를 비관하다가 당나라로 돌아가서 죽었다.
 
== 군 지휘권에 대한 의문 ==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당시 주필산 전투의 총사령관이 고연수, 고혜진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
이유는 당시 주필산 전투에 동원된 고구려군 15만명을15만명은 당시 고구려 인구 및 각 지역에 배치된 병력을 산정할 때 고구려 단일 동원 상 최대 규모에 가까우며 (이와 비슷한 규모의 고구려 대군의 동원은 이후 667년 금산전투에서 고구려군 15만군이 등장한다) 이정도 대부대를 총 지휘할 직급은직급으로 당시 북부[[욕살]], 남부[[욕살]]이었던 고연수나 고혜진으로 보기에는 너무 직급이 낮다고 판단된다. 무엇보다도 주필산전투에 대한 기록이 당시 당나라측으 자료 구당서, 신당서 등에만 의존하고 있고 시기적으로 이어지는 안시성전투와의 과정에 공백이 있으며 이후 전투에 대해 구체적인 상황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의존하고 있고 시기적으로 이어지는 안시성전투와의 과정에 공백이 있으며 이후 전투에 대해 구체적인 상황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사학자들은 북부[[욕살]] 고연수, 남부[[욕살]] 고혜진은 고구려 15만군의 선봉이었고 총사령관은 당시 사서에 등장하여 전략을 세웠던 대대로 [[고정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또한 사서에 기록된 것 처럼 고정의는 대대로라는 높은 직급과 나이많고 경험이 많은 것으로 기록되어 과거 고구려-수 전쟁 때도 경험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