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 반란: 두 판 사이의 차이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옳은 표현. 광주사태는 잘못된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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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옳은 표현. 광주사태는 잘못된 용어.)
'''12·12 군사 반란'''(- 軍士 反亂) 또는 '''12·12 사태'''(- 事態)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은 12.12 군사 반란으로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고, 5·17 쿠데타에 항거한 [[5.18 광주사태광주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전두환은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 사건의 배경 ==
== 반란 이후 ==
{{참고|K-공작계획|5.17 쿠데타|제5공화국}}
12·12는 숙군 목적을 띤 군내부의 반란이었다. 정권을 탈취한다고 하는 의미로의 쿠데타에 해당하는 것은 오히려 [[1980년]]의 전국 비상 계엄령으로부터 [[광주 사태광주민중항쟁]]에 이르는 과정([[5.17 쿠데타]])이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최규하를 사임시키고 신군부가 실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1980년 1월 군장성들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공사석에서 12·12 군사 반란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장성들은 내쫓기거나 보직이 변경되는 등, 군부가 정권장악의 도구로 이용될 준비가 갖추어졌다. <ref>{{서적 인용|저자=이계성|꺾쇠표=예|제목=지는 별 뜨는 별: 청와대 실록|출판사=한국문원|연도=1993|쪽=280}}</ref> 미국과의 관계는 신군부의 뜻대로 쉽게 풀리지 않았다. 주한 미군사령관 [[존 위컴]] 장군은 군사 반란을 인정하지 않았다. <ref>{{서적 인용|저자=이계성|제목=앞의 책|쪽=296|인용문=12·12 군사 반란 직후 보안사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나왔던 한 예비역 장성의 말이다. {{인용문2|내가 보안사에 붙잡혀 들어가자 집사람이 생각다못해 전두환 장군의 부인 이순자씨를 찾아갔다고 한다. 집사람은 이씨와 아우 형님 하면서 잘 지내온 사이였다. 집사람이 '어떻게 남편을 살릴 수 없겠느냐'고 사정을 하자, 이씨는 '우리 형편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인정을 안해줘 남편의 일이 실패해서 졸도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전장군은 위컴 사령관이 12·12 거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인사를 통해 분명히 전해오자 크게 상심했다는 말을 나도 나중에 들은 적이 있다.}}}}</ref>
 
박정희 정부 시대와 비슷한 군부 체제를 형성하려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저항하여 5월 중순부터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1980년]] [[5월 17일]] [[5·17 쿠데타|군사 쿠데타]]에 의한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5월 18일]]부터 이에 항거한 [[광주 사태광주민중항쟁]]이 발생하자,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5월 24일]] [[김재규]] 등 [[박정희]] 피살 관련자는 대법원 판결 확정 후 즉결심판으로 처형됐다. 같은 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했고 [[9월 1일]]에는 전두환 장군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ref>일명 장충체육관선거, 한국 현대사의 치욕 중 하나</ref>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국보위]]는 헌법을 개정했고,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 처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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