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Dysi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황권'''(黃權, 151 {{출처|날짜=2012-12-13|[[151년]]}} ~ [[240년]])은 [[중국]] [[후한]] 말 ~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의 정치가로, [[자 (이름)|자]]는 '''공형'''(公衡)이며 익주(益州) 파서군(巴西郡) 낭중현(閬中縣) 사람이다.
 
== 생애 ==
 
===유장 휘하 ===
일찍이 군리가 되었고 후에 익주목 [[유장 (후한)|유장]](劉璋)이 주부(主簿)로 발탁했다.<ref name="s43">[[진수 (서진)|진수]]: 《[[삼국지]]》 권43 황이여마왕장전 중 황권전{{위키문헌|:zh:三國志/卷43|삼국지 권43 황이여마왕장전}}</ref>
 
익주별가 [[장송 (후한)|장송]](張松)이 유장에게 좌장군으로 형주에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유비]](劉備) 입촉맞아들여 한중의 그에[[오두미도]] 상응한세력(당시 호응을 보여주기 위해 황권을 시켜천사는 [[장로 (후한)|장로]](張魯))을 공격하라는 건의를 했으나,했다. 오히려 장송을 꾸짖고 [[유장 (후한)|유장]]에게 간언하여 말했다.<ref name="s43"/>
{{인용문2|좌장군(유비)은 용맹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이르도록 요청하더라도, 부하로서 그를 대우한다면 그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고, 빈객으로 접대한다면 주인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 같은 위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단지 국경을 폐쇄하고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황권의 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유장 (후한)|유장]]은 오히려유비를 [[유비]]의맞아들이고 심기에황권은 누가 될까봐 황권을 좌천시켜 광한현장광한장(廣漢長)으로 보냈다삼아 자기 곁에서 밖으로 내보냈다. 이후 [[유비]]가 촉을 공격한공격하자 이후에도여러 군현이 유비에게 항복하였음에도 성문을 걸어잠그고잠그고 유비에게 대항했으나, [[유장 (후한)|유장]]의 항복 소식을 듣고 그제서야 마음을 돌렸다. 그의유비는 충심에투항한 감복한황권을 유비가임시로 그를편장군으로 중용하였다삼았다.<ref name="s43"/>
 
=== 촉한의 신료 ===
이후[[건안]] 20년([[215년]]), [[장로 (후한)|장로]]가 [[조조]](曹操)에게 한중을공격을 잃었을받아 당시[[한중]]을 잃고 파중으로 달아나자,<ref name="s08">위와 같음, 권8 2공손도4장전 중 장로전{{위키문헌|:zh:三國志/卷08|삼국지 권8 2공손도4장전}}</ref> 한중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한중을 잃는다면 삼파(三巴 : 파 · 파동 · 파서 3군을 일컫는 말)가 위태로워질 것이다."라고 간언했다. 유비는 이를 받아들여 황권을 호군으로 삼고 장로를 맞아들이게 했으나 장로는 조조에게 투항했다.<ref name="s43"/> 그러나 유비는 이후에도 [[법정 (후한)|법정]](法正)의 진언을 받아들여 계속 군을 파견하여 한중(漢中)을 정벌하게 하였다.<ref name="s32">위와 같음, 권32 선주전</ref> 두호, 박호의 격파, [[하후연]](夏侯淵)을 죽인 것 모두가 황권의 계략이었다.<ref name="s43"/>
 
[[유비]]가 오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간언하여 말했다.
유비는 이를 받아들여 황권과 [[법정 (후한)|법정]](法正)으로 하여금 한중(漢中)을 정벌케 하였다. 두호, 박호의 격파, [[하후연]](夏侯淵)을 죽인 것 모두가 황권의 계략이었다. [[유비]]가 오나라를 정벌할때도 간언하여 말했다.
 
{{인용문2|오나라 사람은 용감하여 전쟁을 잘하고, 또 촉의 수군은 물의 흐름을 따라 행동하므로, 전진하기는 쉬워도 물러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먼저 가서 적군의 허실을 살피고, 폐하께서는 응당 뒤에서 지키시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유비]]는 황권으로 하여금 혹시라도 쳐들어올지 모르는 위를 장강 북쪽에서 막게 하고 스스로가 오를 정벌하러 출정했다. 그러나 결국 [[이릉 대전]]의 패배 후 길이 끊겨 돌아갈 곳이 없는 황권은 [[위 (삼국)|위나라]]에 귀순하였다.<ref name="s43"/>
 
=== 조위에 귀순한 후 ===
촉한의 많은 신하들이집법관은 황권의 처자에게 형벌을 가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유비]]는 "그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버렸다"라고 말하며 그의 처자에게 이전과 같이 대우했다. 이후 황권은 [[조비|위 문제]]에게는 황권이 유비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좋아해 진남장군으로 삼고 육양후에 봉했으며 시중을 더했다. 또 자기와 함께 수레에 탈 수 있게 했다. 이후 황권의 처자가 주살되었다는 헛소문이 돌았으나 황권은 믿지 중용되었으나않았으며, 유비에 대한 충절을 잊지 않아 유비의 죽음에도 기뻐하지 않았다.<ref>삼국지 권43 중 황권전의 본문에는 '홀로 하례하지 않았다'고 하나, 마찬가지로 한때 유비를 섬긴 [[원환]] 역시 하례하지 않았다. 기실, 삼국지 권11 중 원환전의 본문에서도 '(원환이) 홀로 하례하지 않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ref> 이를 안 위 문제가 황권을 놀래키려는 생각으로 심문을 하기 위해 그에게 황궁으로 출두를 명하였으나 혼비백산한 그의 수하들과 식솔들과 달리 태연자약하게 나아가 오히려 위 문제에게 더욱 인정을 받았다.<ref name="s43"/>
 
이후 익주자사를 겸하였고 [[경초 3년(위)|경초]] 3년([[239년]]) 거기장군, 의도삼사로· 의동삼사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다음해에 90세의 나이로이듬해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를 경후라 했다.<ref name="s43"/>
 
==사후==
 
슬하에 아들 황옹(黃邕)을 두었으나, 황옹에게 아들이 없어 그의 작위가 끝나게 되었다.<ref name="s43"/>
촉에 남겨둔 아들인 [[황숭]](黃崇)의 경우에는 [[263년]] [[위의 촉 정벌]] 때 [[등애]](登艾)가 침공했을 당시 [[제갈량]](諸葛亮)의 아들인 [[제갈첨]](諸葛瞻)과 함께 [[면죽관]](綿竹關)에서 필사의 각오로 항쟁하였으나 결국 죽었다.<ref name="s43"/>
 
== 《삼국지연의》에서의 황권 ==
줄 43 ⟶ 42:
[[황숭]]
 
== 주석 ==
[[분류:151년 태어남]]
<references/>
[[분류:151년생년 태어남미상]]
[[분류:240년 죽음]]
[[분류:유비 휘하의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