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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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에서 [[레오폴 1세]]와 [[왕비]]인 [[오를레앙의 루이즈마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65년]] [[12월 17일]] 대관식을 치렀고 죽을 때까지 왕의 자리를 지켰다.
 
레오폴은 주로 [[콩고 자유국]]의 창립자 그리고 지배자로 유명하다. 그는 해외식민지를 소유하는 것만이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여겼다. 이 때문에 [[헨리 모턴 스탠리]]에게 [[콩고]]를 탐사하게 해 결국엔 1885년 개인 소유의 [[콩고 자유국]]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콩고]]인들을콩고인들을 무자비하게 다뤘고 수백만 콩고인들의 생명을 빼앗아갔다. 결국 벨기에 의회에 의해 소유권을 벨기에 정부로 넘겨주게 되었다.
 
== 개인 식민지화 ==
레오폴은 해외식민지를 건설하는 것만이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고 해외식민지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벨기에 정부는 그의 모험을 위해 돈을 빌려줬긴 했지만 관심은 없었고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차례의 쓴 고배를 마신 후 1876년 과학, 박애주의 단체로 위장한 [[국제아프리카협회]]란 [[지주회사]]를 만들었다. 1876년 이 지주회사를 통해 그는 유명한 탐험가 [[헨리 스탠리]]를 고용해 [[콩고]] 지역을 탐사하도록 하였다. 그는 여러 외교적 작전을 통해 1884년 [[베를린 회의]]에서 14개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그를 [[콩고]]의콩고의 합법적인 지도자로 인정해주었다. 1885년 2월 5일, 그는 마침내 [[콩고 자유국]]을 창립하고 그 나라의 지배자가 되었고 사병을 통해 다스렸다. 이 개인소유의 나라는 벨기에의 76배 크기를 가졌고 동부 미국과 비슷한 크기였다.
 
이 식민지에서의 최초의 [[착취]]의 대상은 상아였다. 하지만 이것은 예상한 만큼의 이익을 내지 못했고 고무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고무나무로부터 수액를 추출하는데 노동력을 집중시켰다. 그는 1890년대 후반부터 [[베를린 회의 (1884년)|베를린 회의]]에서의 약속을 어기고 [[콩고]]에서고에서 외국에서의 접근을 차단하고 토착인들을 강제노동자로 만들었다. 그는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경우 신체를 절단하도록하는 잔인한 방법을 통해 강제노동을 시켰다. 그의 악행은 결국 해외에, 특히 선교사들을 통해 알려지고 비난받게 되었다.
 
그의 잔혹한 통치방식과 착취에 대한 비난, 그리고 [[인권]]에 대한 요구로 [[콩고]]를 그의 손에서 [[해방]]시킬 것이 세계각지에서 요구되었다. 결국 벨기에 의회는 1908년 그의 [[콩고 자유국]] 통치를 멈추도록 결의했고 콩고는 [[벨기에령 콩고]]로서 벨기에의 식민지가 되었다.
결국 1908년에 벨기에 의회는 그의 [[콩고 자유국]] 통치를 멈추도록 결의했고 콩고는 [[벨기에령 콩고]]로서 벨기에의 식민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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