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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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에서 [[레오폴 1세]]와 [[왕비]]인 [[오를레앙의 루이즈마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65년]] [[12월 17일]] 대관식을 치렀고 죽을 때까지 왕의 자리를 지켰다.
레오폴은 주로 [[콩고 자유국]]의 창립자 그리고 지배자로 유명하다. 그는 해외식민지를 소유하는 것만이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여겼다. 이 때문에 [[헨리
== 개인 식민지화 ==
레오폴은 해외식민지를 건설하는 것만이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고 해외식민지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벨기에 정부는 그의 모험을 위해 돈을 빌려줬긴 했지만 관심은 없었고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차례의 쓴 고배를 마신 후 1876년 과학, 박애주의 단체로 위장한 [[국제아프리카협회]]란 [[지주회사]]를 만들었다. 1876년 이 지주회사를 통해 그는 유명한 탐험가 [[헨리 스탠리]]를 고용해
이 식민지에서의 최초의 [[착취]]의 대상은 상아였다. 하지만 이것은 예상한 만큼의 이익을 내지 못했고 고무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고무나무로부터 수액를 추출하는데 노동력을 집중시켰다. 그는 1890년대 후반부터 [[베를린 회의 (1884년)|베를린 회의]]에서의 약속을 어기고 [
그의 잔혹한 통치방식과 착취에 대한 비난, 그리고 [[인권]]에 대한 요구로 [[콩고]]를 그의 손에서 [[해방]]시킬 것이 세계각지에서 요구되었다. 결국 벨기에 의회는 1908년 그의 [[콩고 자유국]] 통치를 멈추도록 결의했고 콩고는 [[벨기에령 콩고]]로서 벨기에의 식민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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