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르 (조지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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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정보
|이름 = 타마르<br />თამარი
|그림 = Queen TamaraTamar of- GeorgiaVardzia fresco.jpg
|그림 크기 = 200px
|설명 = 타마르"모든 여왕을동방의 묘사한왕중의 왕, 타마르..." [[바르지아 수도원]]에 있는 성모영면 교회의 벽화. 1184~1186년경.
|칭호 = 조지아의 여왕
|본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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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기와 왕위 등극 ==
타마르는 [[조지아의 왕]] [[조지아의 게오르게 3세]]와 [[알라니아]] 왕의 딸인 왕비 부르두칸 사이에서 1160년경에 태어났다. 타마르에게는 [[루수단 (조지아의 게오르게 3세의 딸)|루수단]]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녀의 여동생은 타마르의 통치 기간과 동시대의 모든 기록들 가운데서 딱 한번 언급됐을 뿐이다.<ref>Eastmond (1998), p. 108, fn. 49.</ref> [[타마르 (이름)|타마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가 기원이며 [[성경]]상의 이름과 유사하고, [[연합 이스라엘 왕국|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인 [[다비드]]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조지아의 바그라티오니 왕조가 선호한 이름이다.<ref>Toumanoff (1940), p. 299, fn. 4.</ref>
 
[[파일:Queentamar giorgi.jpg|300px|thumb|right|여왕 타마르와 그녀의 부친 [[조지아의 게오르게 3세|게오르게 3세]] ([[베타니아 수도원]]의 복원된 프레스코화)]]
타마르의 유년기와 동시대에 조지아에서는 중대한 격변이 일어났다. 1117년에 그녀의 부친 게오르게 3세는 몇몇 귀족 파벌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그 반란자들은 게오르게를 폐위시키고 살해 당한 [[조지아의 다비트 5세|다비트 5세]]의 아들로 많은 사람들이 합법적인 왕위 계승권자라고 생각했던 게오르게의 조카인 [[조지아의 뎀나|뎀나]]를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뎀나가 왕이 되려는 의지는 미약했지만, 그의 왕위 계승권은 그의 양부를 사칭하는 [[보안관]] 이바네 오르벨리의 주도로 귀족들에 의해 왕권을 약화시키려는 그럴싸한 구실이 되었다.<ref>Khazanov & Wink (2001), pp. 48–49.</ref> 게오르게3세는 반란군 진압했고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 파벌들을 엄중 처벌하는 격렬한 군사 작전도을 실시했다. 이바네 오르벨리는 처형되었고 살아남은 그의 가족들을은 조지아 밖으로 추방되었다. 뎀나 왕자는 그의 삼촌의 명령으로 거세되었고 장님을 만들어 버렸으며, 불구가 된 뎀나 왕자는 그 후로 오래 살지 못하고 얼마 못가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ref>Eastmond (1998), pp. 106–107.</ref> 반란이 진압되었고 반란 가담자들 역시 제거되었는데, 그에 앞서 한때 게오르게는 타마르를 공동 통치자로 선임했었고, 그녀는 1178년에 섭정왕이 되었다. 그렇게 하여 왕은 그가 죽은 후에 조지아의 왕위 계승에 대한 그의 합법적인 혈통에 대한 어떠한 논쟁도 없게 하려 했다.<ref name="Eastmond-108">Eastmond (1998), p. 108.</ref> 그와 동시에, 게오르게는 중앙집권의 귀족 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뜻을 같한다면 상류증 귀족들은 물론이고 비주류 계층의 사람들도 요직들에 임명시켰다.<ref name="Khazanov-49">Khazanov & Wink (2001), p. 49.</ref>
 
== 통치 초기와 첫 번째 결혼 ==
[[파일:Vardzia (7)Chapel fresco.jpg|thumb|180px|left|타마르(왼쪽) 게오르게 3세(오른쪽),. 바르지아의바르지아에 있는 [[도미션성모 안식]] 성당에교회에 있는 12세기잔존하는 벽화가장 오래된 타마르의 초상화. 1184~1186년경.]]
타마르는 6년동안 그의 부친이 죽던 1184년까지 섭정했고, 이어서 단일 군주가 되었으며, 조지아 동부의 [[쿠타이시]] 근교에 있는 [[겔라티 수도원]]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그녀는 비교적 강력한 왕국을 승계했지만, 고위급 귀족들에 의해 조장된 중앙집권을 흐트려트려 놓으려는 풍조는 가라 앉을 줄을 몰랐다. 타마르의 계승을 반대하던 심상치 않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부친이 그들을 억압했던 정책에 대해 반기를 들어 올렸지만, 새로운 군주의 취약점, 즉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더 부추겼던 것이다.<ref name=" Eastmond-108"/> 그녀 전까지만 해도 조지아에서는 여성 군주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일부는 타마르 여왕의 적법성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어린 점을 이용해 그녀의 결점이 오히려 그들의 대자치권을 확고히 해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ref name=" Eastmond-108"/> 타마르의 영향력 있는 고모인 [[루수단 (조지아의 데메트레 1세의 딸)|루수단 여왕]]과 [[조지아의 모든 가톨리코스-파트리아르츠|조지아의 가톨리코스]] 미차엘 4세 미리아니시제의 열정적인 도움은 조지아 왕국을 승계한 타마르 여왕을 합법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ref>Lordkipanidze (1987), p. 135.</ref> 그녀는 가톨리코스 미차엘의 도움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대법관]]에 임명했고, 그리하여 미차엘은 성직과 세속의 공무 체계 양쪽 모두에서 수장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ref name="Suny-39">Suny (1994), p. 39.</ref>
[[파일:Uplistikhe complex 02.jpg|thumb|[[우프리스치케]]의 암석 단지, 1178년에 게오르게 3세가 타마르를 왕위에 올렸다.]]
타마르는 그녀의 부친인 게오르게 3세가 그에게 도전하던 귀족들을 엄중 처벌하는데 도움을 줬던 그의 부친이 임명했던 사람들 중에서 낮은 신분 태생의 [[조지아의 킵차크인|조지아인화 된 킵차크인]]인 쿠바사스 보안관의 해임을 촉구하기도 했다.<ref name="Khazanov-49"/> 게오르게 3세가 비천한 신분으로의 숙명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그의 무명의 시중들 중에 한명은 그 때에 새로운 의회인 ''카라비''를 조직해 의회만 따로 떨어져 심사숙고 하여 정책을 결정했던 그렇게 왕권을 제한하려는 투쟁 중에 있었던 귀족 단체들과 부유한 시민들을 이끌던 [[재무 담당자]] [[쿠틀루 아슬란]]이었다.<ref name="Suny-39"/> 타마르가 쿠틀루 아슬란을 체포하고 그의 추종자들을 구슬려서 항복하게 함으로 "봉건 [[입헌 정치]]"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ref name="Khazanov-49"/> 하지만, 상류층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타마르의 첫 행보는 완전히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녀는 [[교회 회의]]를 통하여 가톨리코스 미차엘을 해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귀족 의회 ''다르바지''가 국왕 법령의 승인권을 주장했다.<ref name="Suny-39"/> 그녀의 첫 번째 남편 마처도 귀족들에 의하여 강요된 [[루스족]] 왕자 [[유리 보골류프스키]]였다.<ref name="Suny-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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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결혼 ==
[[파일:Tamar of Georgia, Q'incvisi mural.jpg|thumb|left150px|타마르 여왕을 묘사한 [[킨츠비시 수도원]]에 있던있는 13세기 벽화]]
1187년, 타마르는 허구헌날 술에 쩔어 사는 알코올중독과 [[변태 성욕|변태 성행위]]로 고발당해 [[콘스탄티노플]]로 떠난 유리와의 이혼 승인을 위해 귀족 회의를 설득했다.<ref name="Lordkipanidze-142"/> 타마르의 권력 성장이 억제되기를 너무나도 바랐던 몇몇 귀족들의 원조로, 유리가 두 번의 쿠테타를 일으키도록 했지만, 실패했고 1191년 이후에는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다.<ref name="Khazanov-49"/> 두 번째 남편은 여왕이 스스로 선택했다. 그는 [[알라니아|알란]] 왕자 [[다비트 소슬란]]이었다. 18세기의 조지아의 학자 [[바쿠시티]]는 그를 11세기 초반의 조지아 왕 [[조지아의 게오르게 1세|게오르게 1세]]의 후손이라고 기술했다.<ref>Alemany (2000), p. 321.</ref> 유능한 군사 지휘관인 다비트는 타마르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고 유리의 그늘에서 모략을 일삼던 반란 귀족들을 무찌르는데 도움이 되었다.<ref name="Lordkipanidze-143">Lordkipanidze (1987), p. 143.</ref>

타마르와 다비트는 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1191년에 여왕은 아들 게오르게(웃날훗날 [[조지아의 게오르게 4세|게오르게 4세 (라샤)]])의 출생 소식을 왕국에 널리 알리고 축하 행사를 열었다. 딸 [[조지아의 루수단|루수단]]은 1193년에 태어났고 훗날에 그녀의 오빠를 계승해 조지아의 군주가 되었다.
 
예술 작품 뿐만아니라, 헌장, 동전에서도 등장하는 [[국서]]인 다비트의 지위는 왕의 위엄은 남성적인 성격도 띄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그는 타마르와 왕위를 공유하고 타마르에게서 얻은 권력만 지니는 보다 하급의 통치자에 머물러 있었다.<ref name="Lordkipanidze-143"/><ref>Eastmond (1998), pp. 135–137.</ref> 타마르는 계속 "[[왕중왕|왕중 왕]]"(''메페타 메페'')라고 불리었다. 조지아에서, [[문법상 성별]]이 없는 용어인 ''메페''("왕")는 남성적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 않으며 "주권자"라고 번역될 수 있다.<ref>Rapp (2003), p. 263.</ref><ref name="Eastmond-109">Eastmond (1998), p. 109.</ref> 그리고, ''메페''는 [[왕비]] 혹은 왕의 모친이나 왕보다 연장자인 왕의 여성 친인척에게 적용되는 용어인 ''데포팔리''("여왕")의 뜻도 가지고 있다. 타마르는 조지아 연대기와 다소의 헌장에서 때때로 ''데포팔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타마르에의 ''메페''라는 칭호는 여성들 가운데서 그녀의 고유한 지위를 상징하기 위해 기술되었을 수도 있다.<ref name=" Eastmond-109"/>
 
== 외교 정책과 군사 작전 ==
=== 무슬림 이웃국들주변국들 ===
[[파일:Caucasus 1213 AD map de.svg|thumb|1213년 조지아와 주변국들]]
[[파일:Vardzia 05(17).jpg|thumb|left|바르지아의 폐허가 된 동굴 마을동굴마을]]
일찌기 타마르는 그녀의 왕권을 강화했으며 다비트 소슬란, 므크하르그르드젤리, 다른 귀족 가문들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고, 그녀는 그녀의 부친의 팽창주의 외교 정책을 다시금 펼치게 되었다. [[엘디구지드|아제르바이잔의 아타베그]], [[시르반샤흐]], [[아흘타샤흐]]와 같은 [[셀주크 제국]]의 지역 통치 후계자들의 분투와 접목된 조지아에서의 왕조에 대한 반복적인 불화는 타마르의 증조부 [[이베리아의 다비트 4세|다비트 4세]] 시대와 그녀의 부친 게오르게 3세의 통치 기간 동안에 둔화되었다. 그러나, 조지아인들은 타마르의 통치 하에서, 그녀의 통치 기간에서 제2의 10년 동안 두드러지게 다시 활기를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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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9년, 타마르의 군대는 두 명의 형제 자카레와 이바네 므크하르그르드젤리가 [[아르메니아]]의 지난날의 수도인 [[아니 (도시)|아니]]에서 [[샤드다디드]] 왕조를 축출하는 작전에 성공하여 또 다른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전투를 지휘했던 그 형제에게는 여왕으로부터 봉토를 봉토를 하사받았다. 그 형제는 아니를 기반으로 하여 잇따라 지방 무슬림 통치자들로 부터 또다른 요새와 지대를 점령했는데, 1201년에는 [[브즈니]], 1203년에는 [[드빈]]을 점령하여 아르메니아의 중심부 영토까지 세력 범위를 넓혔다.<ref>Lordkipanidze (1987), p. 150.</ref>
 
[[파일:Vardzia 05.jpg|thumb|left|바르지아의 폐허가 된 동굴 마을]]
조지아의 성공에 자극받은 셀주크 룸술탄의 [[룸 술탄국|룸 술탄]] [[술레이만샤흐 2세]]는 봉신 [[아미르|에미르]]들을 소집해서 조지아에 대항하는 공격에 착수했지만, 1203년 또는 1204년에 [[바시안 전투]]에서 다비트 소슬란이 이끄는 군대에게 기습당해 패배했다. 타마르의 연대기 편자는 그 군대가 바시안으로 움직이기 전에 어떻게 [[바르지아]]의 암석 도시로 집결했는가와 어떻게 여왕이 교회 전망대에서 대군에게 명령을 하달했는지에 대해서 서술했다.<ref>Eastmond (1998), p. 121.</ref><ref>Lordkipanidze (1987), pp. 150–15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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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비존드와 중동 ===
[[파일:Iviron Aug2006.jpg|thumb|아토스 산에 있는 [[이비론 수도원]], 조지아 왕권의 혜택을 받은 기독교 문화의 주요한 중심지]]
[[파일:MinzarHamatzleva ST 04.jpg|thumb|left|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수도원]], 과거에 조지아의 수사들이 거주했으며 타마르 여왕의 후원을 받았다.]]
타마르의 통치 기간 중에 주목할 만한 사건은 1204년에 [[흑해]]에서 [[트라페주스 제국|트레비존드 제국]]의 건국이이었다. 그 왕국은 [[알렉시오스 1세 (트라페주스)|알렉시오스 콤네누스]]와 그의 동생 [[다비트 콤네누스|다비트]]가 조지아 대군의 원조를 받아 해체된 [[비잔틴 제국]] 북동부의 [[폰토스|폰티크]]에 설립한 나라였다. 알렉시오스와 다비트는 타마르의 친척으로 조지아 왕실에서 추대된 일시적인 비잔틴 왕자들이었다.<ref>Tamar's paternal aunt was the Comnenoi's grandmother on their father’s side, as it has been conjectured by Toumanoff (1940).</ref> 타마르의 공식 역사가에 따르면, 조지아의 트레비존드 원정의 목적은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4세|알렉시우스 4세 안겔루스]]가 조지아의 여왕이 [[안티오키아|안티오크]]와 [[아토스 산]]에 보낼 봉헌금 선적을 강탈한 것에 대한 처벌이었다. 그러나, 타마르의 폰티크 원정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항하는 [[서유럽]]의 [[제4차 십자군]] 전쟁을 기회로 활용해 조지아의 서남쪽의 바로 인접한 영토에 왕조의 연대에서 소외된 콤네노이에 의해 건국된 우방국을 두려는 그녀의 열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ref>Eastmond (1998), pp. 153–154.</ref><ref>Vasiliev (1935), pp. 15–19.</ref>
 
타마르는 국제 무대에서 조지아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중동]]의 기독교의 보호국이었던 비잔틴 국왕의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십자군이 아이유브조 [[이집트의 술탄|술탄]] [[살라흐 앗딘|살라딘]]과 대립하고 비잔틴 제국이 쇠퇴하는 국면을 이용한 듯 하다.<ref name="Pahlitzsch-38-39">Pahlitzsch, Johannes, "Georgians and Greeks in Jerusalem (1099-1310)", in Ciggaar & Herman (1996), pp. 38–39.</ref><ref name="Eastmond 1998, p. 96">Eastmond (1998), p. 96.</ref> 조지아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남캅카스]]에서 활동했고 국외의 자국인 수도원 공동체들은 [[지중해]] 동부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타마르의 공식 연대기에서는 [[이집트]]에서 [[불가리아]]와 [[키프로스|키프러스]]까지의 그녀의 기독교에 대한 전체적인 보호, 그리고 교회들과 수도원들에 대한 후원 활동을 찬양한다.<ref name="Eastmond-122-123">Eastmond (1998), pp. 122–123.</ref>
 
[[파일:MinzarHamatzleva ST 04.jpg|thumb|left|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수도원]], 과거에 조지아의 수사들이 거주했으며 타마르 여왕의 후원을 받았다.]]
조지아 왕실은 먼저 [[성지]]에 있는 조지아의 수도원 중심지들의 보호에 대해 관심을 기울렸다. 12세기 경에는, 여덟 수도원들이 [[예루살렘|제루살렘]]에 있었다.<ref>Eastmond (1998), p. 122.</ref> 살라딘의 전기 작가 [[바하 아드-딘 이븐 샤드다드]]의 보고에 따르면, 1187년에 아이유브조가 제루살렘을 정복한 후에, 타마르가 술탄에게 외교 사절을 보내 제루살렘에 있는 그들이 몰수한 조지아의 수도원들의 소유지들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살라딘의 대꾸는 없었지만, 여왕으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어 갔다. 타마르가 죽은 후에 단기간의 [[아크레의 주교]]로 있는 [[자쿠에스 데 비트리]]는 예수랄렘에서의 조지아의 존재에 대하여 더 나은 근거를 제시했다. 그는 다른 기독교 순례자들과는 대조되게 조지아인들은 그들의 깃발을 휘날리며 도시로의 자유로운 왕래가 허용되었었다고 기술했다. 더군다나 이븐 사드다드는 [[하딘 전투|하틴 전투]]에서 약탈한 유물을 가지고 있던 살라딘에게 타마르가 금괴 20만 쪽을 헌납할 만큼 [[진짜 십자가]]의 유물을 획득하려는 그녀의 노력이 비잔틴 황제를 능가했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ref name="Pahlitzsch-38-39"/><ref name="Eastmond-122-123"/>
 
== 황금 시대 ==
=== 봉건 군주 ===
[[파일:Gugeti Tamari2150.jpg|thumb|[[게구티]]의left|150px|타마르 폐허여왕, 게오르게베타니아에 3세와있던 타마르13세기 여왕의초반의 궁전이프레스코화 있었다.조각]]
타마르 시대의 정치와 문화적 위업들은 그녀 이전의 조지아 역사에서는 선례가 없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업적들은 깊고 복합적인 과거의 역사와 선대가 그 뿌리를 이뤘다. 타마르가 성취한 업적들은 대부분 그녀의 증조부 다비트 4세(즉위. 1189~1125)의 개혁과 가장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좀 더 간접적으로는 11세기의 처음 10년 동안에 조지아의 여러 왕국들과 공국들의 정치적인 통합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타오의 다비트 3세|다비트 3세]]와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바그라트 3세]]의 단합된 노력이 기반이 되었다.<ref>Rapp (2003), p. 413.</ref> [[중세 시대]], 그녀의 통치 기간에서 마지막 해 쯤에, 조지아 왕국의 국력과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타마르의 왕국 영역은 북부와 중앙 아르메니아에서의 충성스러운 자차리아드 관리 체제와 봉신인 시르반과 동맹인 트레비존드를 형성하므로, 북쪽의 [[볼쇼이캅카스 산맥|대캅카스]] 산마루에서 부터 남쪽의 [[에르주룸]]까지 그리고 북서쪽의 [[지기 (조지아)|지기]]에서 동남쪽의 [[간자]]까지 확장되었 판-팝카스 제국을 이뤘다. 동시대의 조지아 역사가는 타마르를 "폰투스의 바다(흑해)에서 부터 [[고르간]]의 바다([[카스피해]])까지, [[스페르 (조지아)|스페리]]부터 [[데르벤트|데르벤드]]까지 그리고 [[하자르족|카자리아]]와 [[스키타이|스키타이아]]의 이쪽에서 저쪽까지"의 모든 영토의 주인이라며 격찬했다.<ref>{{언어링크|ka}} Shengelia, N., [http://www.nplg.gov.ge/ic/DGL/work/SIN/sin%203+/nawili%201/5/2.htm#_ftnref75 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 საგარეო პოლიტიკური ურთიერთობანი თამარის მეფობაში] ("Foreign Relations of Georgia during the reign of Tamar"), in Melikishvili (1979).</ref><ref>Salia (1983), pp. 177–190.</ref>
[[파일:Tamari2150.jpg|thumb|left|타마르 여왕, 베타니아에 있던 13세기 초반의 프레스코화 조각]]
황실 칭호는 상대적으로 확대되었다. 그 칭호는 조지아 왕국 영역의 전통적인 구획들을 좌지우지 했을 뿐만아니라, 이웃한 영토들에서도 조지아의 제왕 패권을 강조하는 새로운 성분을 포함했다. 따라서, 주화들과 헌장들은 그녀의 이름으로 발행되었으며, 타마르는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압하스 왕국|압하지아]],<ref>중세 시대에 "압하지아"와 "압하지아인"이라는 용어는 보통 서부 조지아 전역에서 모든 실제적인 용도들이 포함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용어는 15/16세기에 조지아 왕국이 분열된 후에야, 오늘날 [[압하스 공화국|압하지아]]와 그 지역에 사는 [[:en:Abkhaz people|민족 집단]]에게 한정되는 새로운 의미로 다시 사용되었다. [[:en:Vasily Bartold|Barthold, Wasil]] & [[:en:Vladimir Minorsky|Minorsky, Vladimir]], "Abkhaz", in ''[[:en:The Encyclopaedia of Islam|The Encyclopaedia of Islam]]'', vol. 1, 1960.</ref> [[카르틀리|카르트벨리아]],<ref>"카르트벨리아인"은 현시대의 조지아인들이 그들 스스로를 자칭하는 용어이며, 본래는 [[고전 고대]]와 비잔티움 자료들에서 조지아의 [[카르틀리]]-[[캅카스 이베리아|이베리아]]의 중앙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9세기 경에, 조지아의 문학가들은 "카르틀리"의 의미를 종교, 문화, 언어에 의해 하나가 된 중세 조지아의 다른 지역들까지 넓혔다. Rapp (2003), pp. 429–430.</ref> [[아르란]], [[카케티]], [[아르메니아인]]들의 왕들 중에 왕이이며 여왕들 중에 여왕이시고, [[시르반샤흐]]와 [[샤한샤흐]]이시며, 모든 동방과 서방의 [[전제 군주]]이시고, 세계와 신앙의 영광이시며, [[메시아]]의 투사이신 분"으로 확인된다.<ref>Lordkipanidze (1987), p. 157.</ref><ref>Eastmond (1998), p. 135.</ref><ref>Rapp (2003), p. 422.</ref>
 
황실국왕의 칭호는 상대적으로 확대되었다강화되었다. 그 칭호는 조지아 왕국 영역의 전통적인 구획들을 좌지우지 했을 뿐만아니라, 이웃한 영토들에서도 조지아의 제왕 패권을 강조하는 새로운 성분을 포함했다. 따라서, 주화들과 헌장들은 그녀의 이름으로 발행되었으며, 타마르는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압하스 왕국|압하지아]],<ref>중세 시대에 "압하지아"와 "압하지아인"이라는 용어는 보통 서부 조지아 전역에서 모든 실제적인 용도들이 포함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용어는 15/16세기에 조지아 왕국이 분열된 후에야, 오늘날 [[압하스 공화국|압하지아]]와 그 지역에 사는 [[:en:Abkhaz people|민족 집단]]에게 한정되는 새로운 의미로 다시 사용되었다. [[:en:Vasily Bartold|Barthold, Wasil]] & [[:en:Vladimir Minorsky|Minorsky, Vladimir]], "Abkhaz", in ''[[:en:The Encyclopaedia of Islam|The Encyclopaedia of Islam]]'', vol. 1, 1960.</ref> [[카르틀리|카르트벨리아]],<ref>"카르트벨리아인"은 현시대의 조지아인들이 그들 스스로를 자칭하는 용어이며, 본래는 [[고전 고대]]와 비잔티움 자료들에서 조지아의 [[카르틀리]]-[[캅카스 이베리아|이베리아]]의 중앙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9세기 경에, 조지아의 문학가들은 "카르틀리"의 의미를 종교, 문화, 언어에 의해 하나가 된 중세 조지아의 다른 지역들까지 넓혔다. Rapp (2003), pp. 429–430.</ref> [[아르란]], [[카케티]], [[아르메니아인]]들의 왕들 중에 왕이이며 여왕들 중에 여왕이시고, [[시르반샤흐]]와 [[샤한샤흐]]이시며, 모든 동방과 서방의 [[전제 군주]]이시고, 세계와 신앙의 영광이시며, [[메시아]]의 투사이신 분"으로 확인된다.<ref>Lordkipanidze (1987), p. 157.</ref><ref>Eastmond (1998), p. 135.</ref><ref>Rapp (2003), p. 422.</ref>
그 여왕은 단 한번도 독재 권력을 휘두른 적이 없으며 귀족 의회는 계속 기능했다. 그러나 타마르 자신의 명성과 조지아의 [[봉건 제도]] 번역서인 ''파트론크모바''의 확장에서 볼때 그녀는 해체된 왕국에서 온 더 강력한 왕조의 왕자들을 거느렸다고 할수 있다.<ref>Suny (1994), p. 43.</ref> 그랬을지언정, 그들이 옮겨온 그들에게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에서의 봉건 제도 시행은 반대 없이 통과 되었다. 그래서, 1212년에는 조지아의 북동 국경의 [[프코비]]와 [[체즈안|디도]]의 산악 지방 사람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바네 므크하르그르드젤리가 이끄는 군대와의 3달 간의 격렬한 전투 후에 진압되었다.<ref>[[:en:Kevin Tuite|Tuite, Kevin]] (2003), "Political and social significance of highland shrines in post-Soviet Georgia." ''Amirani'' '''9''': pp. 7–23.</ref>
[[File:GEORGIA, Kingdom. T’amar. Queen Regnant, 1184-1213. Æ Fals (26mm, 6.65 g, 3h). Dated Year 420 of the Paschal cycle (AD 1200).jpg|thumb|타마르의 [[모노그램]]이 특징인 조지아어와 아랍어가 새겨진 구리 동전 (1200년)]]
그 여왕은 단 한번도 독재 권력을 휘두른 적이 없으며 귀족 의회는 계속 기능했다. 그러나 타마르 자신의 명성과명성은 그리고 조지아의 [[봉건 제도]] 번역서인 ''파트론크모바''의 확장에서 볼때확장본에서는 그녀는 해체된 왕국에서 온 더 강력한 왕조의 왕자들을 거느렸다고유지시켰다고 할수한다. 그때는 조지아 봉건주의 역사에서 있다고전시대였다.<ref>Suny (1994), p. 43.</ref> 그랬을지언정, 그들이 옮겨온 그들에게 이전에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던않은 지역에서의지역들에의 봉건봉건제도 제도시행 시행은이식 반대시도는 없이반대없인 통과통과되지 되었다않았다. 그래서그러므로, 1212년에는1212년에 조지아의 북동 국경의 [[프코비]]와 [[체즈안체즈족|디도]]의 산악 지방 사람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바네 므크하르그르드젤리가 이끄는 군대와의 3달 간의 격렬한 전투 후에 진압되었다.<ref>[[:en:Kevin Tuite|Tuite, Kevin]] (2003), "Political and social significance of highland shrines in post-Soviet Georgia." ''Amirani'' '''9''': pp. 7–23.</ref>
 
그 당시 조지아의 통제 하의 번영하는 상업 중심지와 함께, 수공업과 상업은 나라와 왕실에 새로운 부를 가져왔다. 이웃국들에서 가져오는 공물들과 전리품들은 황실 국고에 추가되었고 조지아 사람들은 "농부는 귀족 같고, 귀족은 왕자 같으며 왕자은 왕과 같다."라는 말이 생겨났다.<ref>Suny (1994), p. 40.</ref>
 
=== 문화 ===
[[파일File:Descent into Hell. John the Evangelist. Vani Gospels A-1335, 210v, 12th c.jpg|thumb|타마르의타마르 간청,여왕의 지령으로 복사된 [[바니 복음서]] 폴리오원고에 복사본있는 폴리오.]]
그러한 번영은 비잔틴 서부와 이란의 동부 양쪽 모두다 친근하게 느껴지는 [[기독교]]와 세속이 혼합된 조지아의 독특한 문화의 분출을 이루었다.<ref>Suny (1994), pp. 38–39.</ref> 조지아의 군주권은 기독교에 의해 강화 되었으며 그 지위는 하느님께서 내리셨다고 여겨졌다. 그 시대에 조지아 정교회 건축은 재설계 되었으며 연속적으로 대규모의 도형 대성당이 건설되었다. 비잔티움에서 전래된 황권에 대한 표현은 비길데 없는 자신의 통치권을 지니는 여성 통치자로의 타마르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키는 다양한 방식으로 개선되었다. 현존하는 다섯 기념 교회의 타마르 여왕을 표현한 초상화들은 명백하게 비잔티움의 심상으로 그려졌을 뿐만아니라, 이란의 이상적인 아름다운 여성상에도 가까운 모습이 조지아의 화법으로 특히 강조되었다.<ref>Eastmond, pp. 94, 108–110.</ref> 중동과 조지아의 친밀한 관계는 조지아어와 [[아랍어]]가 녹아있는 동시대의 전설이 표현된 조지아 주조 화폐에서도 강조되었다. 1200년 경에 주조된 일련의 동전들의 비잔틴식의 [[앞면 뒷면|앞면]]에는 지방마다 상이하게 묘사된 타마르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앞면 뒷면|뒷면]]에는 타마르를 "메시아의 투사"로 찬양한 아랍어 명각이 새겨져 있다.<ref>Rapp (1993), pp. 309–33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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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과 묘소 ==
[[파일:Gelati monasterygalleryfull1.jpg|thumb|left|[[세계문화유산]]인 [[겔라티 수도원]], 타마르 여왕이 묻혔다고 추정되는 장소이다곳이다.]]
타마르는 그녀의 남편인 다비트 소슬란보다 오래 살다가 "참혹한 질병"에 걸려 죽기 전에 미리 [[섭정]]으로 그녀의 아들 게오르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트빌리시]]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서 죽었다. 타마르의 역사가는 여왕이 [[고리 (조지아)|고리]] 도시 근교의 나차르메게비 궁전에서 그녀의 [[와지르|비지에르]]와 왕국의 공무에 대해서 토론하던 중에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다고 전했다. 그녀는 트빌리시로 이송되었고 그리고 나서 아그라니 궁전으로 이송되었고 목숨을 거두었고, 모두들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녀의 시신은 [[므츠헤타]]에 있는 대성당으로 그 다음에는 조지아 왕가의 묘지터가 있는 갈레티 수도원으로 이전되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타마르의 사망 년도가 1213년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렇지만, 소수의 명확치 않은 자료들에서는 그녀가 보다 이른 1207년 또는 1210년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ref>Javakhishvili (1983), pp. 280, 291–292.</ref><ref>Vateĭshvili (2003), p. 135, fn. 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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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산과 대중 문화 ==
=== 중세 ===
[[File:Vepkhistkaosani zichy.jpg|thumb|170px|''쇼타 루트타벨리가 타마르 여왕에게 그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헝가리인]] 예술가 [[미할리 지치]]의 그림 (1880년대)]]
여러 세기 동안, 타마르 여왕은 조지아 역사의 [[판테온]]에서 압도적인 양상을 띄었다. 그러나, "황금 시대"였던 그녀의 통치 기간의 그녀에 대한 건축은 그녀의 통치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타마르는 그 시대의 중심이 되었다.<ref name="Eastmond 1998, p. 97">Eastmond (1998), p. 97.</ref> 쇼타 루스타벨리를 포함한 중세 조지아의 많은 시인들은 타마르가 그들의 작품들에 영감을 주었다고 했다. 루스타벨리가 여왕에 대한 사랑으로 인생을 허비했으며 그의 마지막 날은 수도원에서 끝마쳤다는 전설이 있다. 루스타벨리의 시에서 연출되는 노련한 왕인 로스테반이 그의 딸 티나틴을 왕위에 앉히게 되는 드라마틱한 장면들은 게오르게 3과 섭정왕 타마르에 비유한 장면이다.<ref>Rayfield (2000), p. 77.</ref>
 
여왕은 [[차크루카제]]의 ''타마리아니''와 [[이오아네요아네 샤브텔리]]의 ''아불-메시아''와 같은 동시대의 다양한 [[송덕문]]의 주제가 되었다.<ref>Rayfield (2000), pp. 83–85.</ref> 그녀는 그녀의 통치에 촛점을 맞춘 연대기의 주목할 만한 두 기록서에서 [[찬사]]의 주인공이다. ''타마르의 생애, 여왕들 중에 여왕'' 그리고 ''군주의 역사와 찬양''은 조지아 문학에서 타마르를 축성하는 기본적인 문헌들이 되었다. 연대기 편자는 그녀를 "과부들의 수호자", "세 배의 은총"이라고 격찬하며 타마르의 미덕으로 여성의 아름다움, 겸손, 자비심 어린 사랑, 성실, 정결을 특히 강조했다.<ref>Eastmond, Antony. "Gender and Orientalism in Georgia in the Age of Queen Tamar", in James (1997), p. 111.</ref> 타마르는 한참 지나서야 조지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니 복음서]]의 필사본의 부속된 [[그리스어]]-조지아어의 2개국어 [[간기 (출판)|간기]]에서의 그녀는 [[성인 (종교)|성인]]으로의 삶에서도 그 이름이 등장한다.<ref name="Eastmond 1998, p. 97"/>
 
타마르의 이상화는 그의 바로 다음 후계자 통치 하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타마르가 죽고 20년 동안에, [[호라즘 제국|콰레즘]]과 [[몽골 제국|몽골]]의 침입은 조지아의 우세한 상태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ref>Eastmond (1998), pp. 97–98.</ref> 그 이후의 국가 부흥의 기간은 타마르가 성취한 통치 기간에 비해 턱없이 짧았다. 사람들에게는 이상화된 여왕과 실제의 여왕의 경계가 희미해 졌으며 그들은 타마르를 동경하게 되었다.<ref>Eastmond (1998), p. 98.</ref>